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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성화 Aug 31. 2022

용미포 옛집

8. 일상의 추억(2)

 "언니, 저 왔어요."


 지우가 복자 할머니의 팔짱을 끼고 옛집으로 건너왔다.


 "오셨어요? 왔어, 지우야?"


 진서가 두 사람을 반기며 액자를 소중히 툇마루에 내려놓았다. 이준도 인사를 건네고 평소처럼 카메라를 준비했다. 지우와 복자 할머니의 눈이 진서와 이준을 번갈아 살폈다.


 "언니. 손톱 어때요? 물 잘 들었어요?"


 지우가 액자 속 사진을 슬쩍 살핀 후 물었다.


 "엄청!"


 진서는 열 손가락을 쫙 펼쳐 보였다.


 "잘 들었네."


 복자 할머니가 진서의 손톱을 쓱 훑어보고 툇마루에 앉았다. 옆에 놓인 액자를 들어 사진을 보는 할머니의 손톱도 붉었다. 사흘 전 저녁, 지우가 직접 물들여준 봉숭아물이었다. 처음에는 고추장에 담았다 뺀 색이더니 이제는 적당히 붉은 빛을 띄었다.


 지우는 진서의 손가락을 요리조리 만져보더니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이준은 마당 가운데서 카메라를 만지고 있었다.


 "첫눈 오는 날까지 봉숭아물 남아 있으면 첫사랑 이루어 지는 거 알죠?"


 지우가 숨죽이며 진서를 놀렸다.


 "첫사랑은 아닌데. 첫사랑이라고 믿을까? 으하하."


 진서가 짓궂게 대답하며 지우의 손을 쥐었다. 먼저 농담을 건넬 만큼 건강해진 지우가 대견했다.


 "일은 안 힘들어?"


 지우는 요즘 연우의 파밀리에에서 일을 돕고 있었다. 연우는 지우가 탁월한 미각을 가졌다며 모셔갔다.


 "재밌어요. 아직 이것저것 서툴지만 사장님이 잘 알려주세요."


 "요즘 뭐 펀딩 한다고 바쁘다며. 요리 개발까지 하려면 정신없겠다."


 "바로 그 펀딩이 제대로 터졌어."


 언제 왔는지 연우가 불쑥 대화에 끼어 들었다. 연우는 복자 할머니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네며 커다란 상자를 툇마루 한 쪽에 내려놓았다. 그러다 진서의 사진을 발견하고 이준을 보며 웃었다.


 "양반은 못 되지, 맨날."


 진서의 말에 연우는 시선을 돌려 눈을 크게 뜨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크라우드 펀딩 대박났어. 세은 누나 능력이 어마어마하셔."


 "매실 장아찌로 한 거야?"


 진서는 펀딩을 진행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다. 세은의 영업 철학이 첫 판매를 가까운 지인에게 부탁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펀딩은 연우와 세은, 지우, 세 사람이 똘똘 뭉쳐 비밀스레 진행하고 있었다.


 "매실철이 지나서 당장 만들기는 어렵고 대신 다른 걸 준비했지."


 연우는 빨리 뭔지 물어보라는 표정으로 진서를 쳐다보며 재촉했다.


 "뭐?"


 진서는 가볍게 코웃음치면서도 기대를 충족해 주었다.


 "내가 만든 특제 소스."


 "그때 맛 본 거?"


 "응. 조금 더 업그레이드 했어. 가게 오신 손님들께도 맛 평가 부탁했는데 반응이 좋았."


 신나게 자랑하는 연우의 뒤로 세은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왔다.


 "언니. 역시 언니는 능력자였어요. 이미 얼굴에 써 있다니까?"


 진서가 세은을 치켜세웠다.


 "누나 오셨어요?"


 "연우씨도 안녕."


 세은은 연우에게 인사를 전하고 진서를 향해 웃었다.


 "이제 시작이지. 일단 맛은 확실하니까 잘 팔기만 하면 돼."


 "말에 확신이 가득해서 안 믿을 수가 없어. 이제 우리도 살 수 있어요?"


 "사기는. 선물이지. 집들이 선물이야. 다른 분들 것도 넉넉히 챙겨왔어."


 세은이 눈짓으로 툇마루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고마워요, 언니. 빨리 맛보고 싶어요."


 "나도 만들었는데? 내가 들고 왔고?"


 연우가 옆에서 생색을 냈다.


 "네, 네. 알아 모시죠."


 웃고 떠드는 사이 마을 사람들이 차례차례 옛집을 찾았다. 조용했던 옛집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진서는 사람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부지런히 잔치를 준비했다. 지우는 분주히 상차림을 도왔으며, 연우도 화덕에 불을 피우고 준비를 도왔다. 이준은 왁자지껄한 모습을 영상과 사진에 담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한별이 곳곳에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진서에게 다가왔다.


 "게스트 하우스 정리하느라 조금 늦었어요. 미안해요, 누나."


 "미안하기는. 아직 시간 안 됐어. 사장님은 언제 오신대? 재현씨는?"


 "삼촌, 아, 사장님은 곧 오실거요. 나보고 먼저 가서 누나 도와주래요. 재현이 형은 체크인 할 손님이 있어서 한 시간 정도 뒤에 올 걸요?"


 한별은 게스트 하우스 사람들의 소식을 알려주고서 장난기 가득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 알았어요. 화분에 심은 거 무 맞죠?"


 "에이. 벌써 알면 재미없는데? 으하하."


 "꽃도 아니고 왜 무예요?"


 한별은 내내 궁금했다. 화분에 움튼 작은 새싹을 보고 삼촌이 무 싹이라는 걸 알려준 순간부터. 전화로 물어 보려다가 직접 묻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 꽃말이 뭔지 알아?"


 "무는 채소인데 꽃말이 있어요?"


 "나도 이번에 알았어. 있더라."


 "뭔데요?"


 "계절이 주는 풍요. 어때? 그럴싸 하지?"


 "흠. 좋은 말이기는 한데..."


 한별은 꽃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계절의 풍요. 글쎄. 뭐랄까. 좋은 의미 같았지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애매했다. 한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한별의 솔직한 반응에 진서는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다가올 시간마다 계절의 풍요로움을 만끽하라고. 원하는 일 이루면서. 벌써 좋은 일 있다며?"


 "누나 덕분이에요. 영상 출연한 일이 이렇게 이어질 지 몰랐어요."


 한별이 쑥스러운지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나 혼자 공치사하고 싶지만 지우 덕이기도 하지. 소식 듣고 지우도 좋아하더라. 내가 신나서 떠벌렸거든. 으하하."


 "지우 누나한테도 고맙죠."


 한별이 멀리서 상 주변을 오가는 지우 쪽을 보고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다. 지우도 살짝 손을 들어 답했다.


 "대신 살짝 귀띔해봐. 무슨 역할인지."


 진서가 한별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비밀. 잠깐 등장해요."


 "씬 스틸러? 오케이. 거기까지. 나중에 직접 확인할래."


 진서가 시원스레 고개를 까딱하자 한별이 씩 웃었다.


 진서는 한별의 주변에 가상의 네모칸을 그렸다. 화면에 등장할 한별이 벌써부터 기대됐다. 누군가의 첫 시작을 지켜보고 있니 덩달아 설렜다.


 "너는 진짜 잘 될 거야."


 "고마워요, 누나."


 진서는 한별의 일이 잘 풀리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갖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며 지켜본다. 때로는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을 것이다. 화를 내고, 심통도 내고, 싸우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에 된통 당하는 일도, 욕을 퍼붓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철저히 혼자이고 싶은 순간도 올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사람이 빠진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새로운 이야기가 생긴다. 관계와 추억이 인생을 채워간다.


 진서는 북적이는 마당을 살펴보았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재미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려우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인생의 조각이었다.


 "거기 둘! 단체사진 찍어야지! 빨리 와!"


 연우가 큰 소리로 진서와 한별을 불렀다.


 "갈게! 가자, 한별아."


 진서가 연우에게 대답하고 한별에게 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이래봬도 웨딩 촬영 아르바이트도 해봤던 사람입니다. 물론 보조로. 자, 복자 할머니는 이쪽에 서시고."


 연우가 사람들을 한데 모아 이쪽저쪽 자리를 정해주었다.


 "어? 형님! 오셨어요? 인사는 나중에 하시고. 형님은 이쪽. 뒷줄에 서시고."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은 오자 마자 연우의 손에 이끌려 뒷줄 끝자리에 섰다.


 "이 자리는 카메라맨을 위해 비워두시고."


 연우가 진서의 옆자리를 비우며 너스레를 떨었다.


 "카메라맨이 아니라 이준이니까 비워주는 거지."


 복자 할머니가 웃음 띤 호통을 쳤다. 사람들 사이에 왁자지껄한 웃음이 돌았다. 이준은 민망해했고, 진서는 연우를 슬쩍 노려보고서 으하하 웃음이 터졌다.


 "됐어? 됐지?"


 연우가 호들갑스럽게 이준에게 물었다.


 이준은 용미포를 배경으로 옛집과 사람들이 어우러진 모습을 잔잔히 바라보았다. 눈에 담은 장면은 카메라에도 따뜻하게 담겼다.


 "네. 지금 좋아요."


 삼각대와 카메라 조정을 마친 이준이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가볍게 뛰었다.


 진서는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이준을 눈에 담았다.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귓가를 울렸고, 이준이 옆에 서자 심장이 간지러웠다.


 "다들 눈 감으시면 안 돼요. 행복하게 웃으시고요. 불빛 깜빡이는 거 잘 보세요. 3초예요. 이제 누릅니다."


 이준이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카메라와 연결된 스마트폰으로 촬영 버튼을 눌렀다.


 "하나."


 이준이 숫자를 세어갔다.


 진서는 어색하게 경직된 양쪽 볼을 위로 끌어 당겼다.


 어른이 되었나? 모르겠다. 여전히 목적지도 모르는 채 내비게이션 없이 달리는 초보 운전자의 서툰 드라이브 같다. 끊임없이 두리번거리고, 주위를 살피고, 긴장한 채 땀을 삐질 흘리기도 한다.


 나쁘지 않다. 어차피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길. 세상에 길은 많고, 처음 가는 길은 물어보면서 다니면 된다.


 설렌다. 낯선 풍경도, 모르는 것을 묻기 위해 만난 사람도, 어딘 지 모른 채 길을 헤매는 기분까지도.


 "다시! 다시! 나 눈 감았어! 셋 할 때 감았어. 확실해."


 연우의 다급한 외침에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웃었다.


 "한 번 더 찍을게요. 카메라 보세요."


 이준이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촬영 버튼을 눌렀다.


 "하나."


 이준의 손과 진서의 손이 살짝 닿았다. 진서가 머리를 살짝 기울이자 이준의 왼팔이 긴장했다.


 "둘."


 이준이 진서의 손을 잡자, 진서가 이준의 손을 깍지 끼었다. 두 사람의 입가에 비밀스런 웃음이 걸렸다.


 "셋."


 얽힌 손가락에 포근하고 단단한 행복이 피어 올랐다.


 "모두 김치!"


 진서의 목소리가 용미포 옛집에 흘렀다.


 그 여름, 용미포의 일상이 한 조각 추억으로 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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