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행복하다 답했어
5부. 네가 너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꼭 너 같은 애 낳아서 고생을 해봐야 알지.”
나의 고생을 기원하는 것 같은 악담의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본인의 고생스러움을 알아달라는 한풀이 같은 말이다. 자라면서 이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나의 엄마는 나의 어떤 점이 그렇게 고생스러웠는지 궁금해서 여쭤보았다. 나는 정말 착한 딸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네가 뭔가 속 썩이는 게 있었나 보지. 근데 너보다 더한 애 낳아서 키우고 있네. 하하.”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낳으면 나 같은 애가 나온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나 같은 아이, 엄마가 말하는 나보다 더하다는 아이는 도대체 어떤 아이인가.
나의 아이는 내내 순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나의 엄마 역시 애가 너무 순하다며 만날 때마다 “얘는 이미 다 키웠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돌도 되기 전에 이미 다 키웠다는 말을 들은 아이는, 열 살이 넘어서도 여전히 다 키웠다는 말을 듣고 있다.
아이가 착하다던가 순하다던가 하는 것에는 사실 기준이 없다. 하루에 한 번 울면 순하고 열 번 울면 아닌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꼭 누가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아이가 타고나기를 순하다고 말하는 건 좀 운명론적이라 지지하고 싶지는 않다. 마치 아이가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속단하는 것 같아서 싫다. (하지만 운명적인 사랑은 믿는다.)
나는 나의 아이가 순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순하다고 치겠다. 원래부터 순했다면 남편이나 내가 애초에 순둥이었거나 아니면 내가 아이가 순할 수 있도록 태교를 잘 한 덕분이라고 봐야 하는데 이건 좀 애매하지만 짚어보자. 일단 남편은 장난꾸러기 골목대장 출신이고, 나는 유명한 동네 울보에 해결사 노릇을 자처하는 아이였다. 타고난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태교?
하나. 출산 직전까지도 열심히 근무 중이었다. 하루 종일 엑셀과 파워포인트 작업을 한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아이가 컴퓨터를 좋아하는 건 굳이 연결하려면 할 수는 있겠다.
둘. 클래식, 재즈, 가요, 팝, 국악 할 것 없이 다양한 음악을 태교 삼아 들려주었다. 아이가 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자주 몸을 흔들고 장구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어 하며 아이돌 노래도 잘 따라 부르는 걸 보면 영향을 받은 것도 같다.
셋. 뱃속에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주었다. 아이는 학습만화를 엄청나게 읽어대긴 했지만 이제는 좋아하는 작가가 있어서 신간을 기다리기도 한다. (이재문, 선스시 작가님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태교가 아이가 순한 것과는 별로 관련은 없는 것 같다.
생각을 꼬꼬무로 하다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다. 나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정말 많이. 이게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소극적으로… 유레카!)
나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이가 늘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짬만 나면 계속 중얼거렸는데 별 얘긴 아니다.
“엄마는 지금 만둣국 먹는다. 냉만두국인데 만두는 따뜻하고 국물은 차가운 거야. 태어나면 직접 먹어보자.”
“엄마 오늘 일하는데 거래처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근데 화가 안나더라. 사람들이 엄마 임신하고 나서 성격이 좋아졌대.”
“이 음악 어때? 맘에 들어?”
“밤이 늦었어. 열두 시야. 이제 움직이지 말고 좀 자자.”
사람들이 도대체 뭐 하는 거냐고 물어보면 아이와 대화 중이라고, 애가 말을 알아듣고 태동으로 반응을 한다고 답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한 것 같지만, 어딘가에 나의 말을 이해하고 믿어 줄 동지가 있다고 믿고 있다.
뱃속에 있을 때 이 정도인데 태어나고는 오죽했을까. 나는 아이에게 늘 사정을 설명해 주었는데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엄마가 지금 너무 졸려. 이해해 줄래?”, “화장실 다녀올게, 기다려줘.”, “밥 좀 먹을게. 엄마 잘 보이지?” 아이에게 설명을 해주니 아이는 안 울고 잘 기다려주었다. 태어나고 3개월 이전의 이야기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과장도 아니다. 일부러 말하지 않고 화장실에 가 본 적도 있는데 그때는 또 막 울더라.
출산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다.
보통 아이를 재울 때 안거나 업고 흔들어주거나, 유모차를 태워서 동네를 한 바퀴 돈다고 해서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해보았다.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재우면 눕힐 때 다시 깰 수 있고, 침대에서 바로 자는 것보다 훨씬 아이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이를 침대에 눕혀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태어난 지 한 달 된 아이가 맞다.)
“엄마가 너를 안고 재울 수는 있어. 너를 안고 있으면 엄마도 기분이 좋지. 근데 네가 잘 자기는 어려워. 침대에 누워서 자는 게 젤 편하거든. 잘 때는 침대에서 자자.”
거짓말 같지만, 정말 거짓말 같이 아이는 침대에 누워서 잘 잤다. 눕혀놓고 토닥토닥해 주고 더울 때는 부채질을 하며 재웠고, 많은 날은 아이를 재우다가 내가 먼저 잠들기도 했다. 집에 방문한 지인들이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고 누워서 잘 자는 아이를 직접 보고는 놀랐지만, 다들 아이가 원래 순한 것이라 굳게 믿는 듯했다.
결론은 아이가 처음부터 떼를 안 쓴 것이 아니라 나름의 대화와 교감이 있었다고 굳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애가 설마 알아서 잘하고 알아서 다 컸을까. 누군가가 고생을 해야 크는 것 아니겠는가.
나의 엄마가 말한 ‘너 보다 더한 애’라는 것에도 할 말은 있다. 엄마 기준에 나 어릴 적 보다 손주가 더 똑똑하다는 것인데, 이것도 원래 태어나길 똑똑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운명적으로 똑똑하게 태어났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나. 참고로 똑똑하다는 건 공부를 잘하고 성적이 좋다는 것보다는 성격이 똑 부러진다는 의미에 가까운데, 이것도 계기와 과정이 있다.
아이가 분명한 자신만의 기준을 갖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제대로 하게 된 건 남편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여보, 친구들이 우리 아들한테 아파트에 안 살고 빌라에 산다고 놀리고 그러면 어쩌지?”
“응? 그런 걸로 놀린다고 놀려지나?”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라 남편의 말이 조금 충격이었다. 내가 남들 가진 게 부럽지 않다고 해서 아이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거다.(가수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어’는 아이와 나의 애창곡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해결책은 루틴이다. 루틴을 잘 지키면 나를 단단히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아무리 간단하다고 해도 스스로 세운 원칙과 습관을 지키는 것은 하루를 작은 성공으로 시작하는 일이고, 뒤돌아 보았을 때 자기 자신에게 칭찬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3가지 정도이다.
지각하지 않기(당연히 결석도 안 하기)
매일 빼먹지 않고 학습기기 하기
일어나서 이불 정리하기
첫째, 지각하지 않기. 이게 미취학 어린이에게는 쉽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아침에 출근을 해야 하는 이유도 있지만, 아이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준비해서 늘 같은 시간에 어린이집에 가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린이집에 제시간에 가는 것은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둘째, 매일 학습기기 하기. 5살부터 (놀이활동이 대부분인) 학습기기를 시작했다. 학습에 도움이 되는 걸 기대했다기보다는 매일 꾸준히 하는 습관을 들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식사하기 전까지 학습기기를 한다. 미리 해둬야 저녁에 편하게 놀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셋째, 이불 정리. 이제는 거의 호텔리어 수준인데, 한 번은 여기가 우리 집이 맞나 싶어서 눈을 씻고 다시 본 적이 있다. 본인이 침대를 잘 정리하면, 저녁에 침대에 몸을 던질 때 기분이 참 좋다.
아이에게 루틴을 만들어 준 것의 가장 큰 축복은 아이 스스로가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엄마, 나 공부부터 끝내고 나올게.” 하며 방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발걸음은 전혀 무겁지가 않다.
이런 루틴들은 여행지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일어나면 둘이 함께 침구정리, 각자의 캐리어에서 옷과 가방을 챙기고 바로 캐리어 닫아두기, 조식 먹고 그날의 공부(둘이 같이 하기 위해 듀오링고 app을 설치했다.)는 오전에 후딱 하고 놀러 나가기. 쓰다 보니 이것은 자기주도 학습과 자기 주도 여행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지만, 우리 둘은 손발이 척척 맞는 완벽한 여행 파트너였다는 것이 결론이다.
이 글의 진짜 결론. 아이가 똑똑하면 다 엄마가 잘 가르친 거고 순하면 엄마가 잘 키운 거다.
혹시나 아닌 부분이 있다면, 점점 나아지고 있는 과정인 것이 확실하다. 믿으세요. 믿어야 사실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