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행복하다 답했어
5부. 네가 너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가끔은 정말 귀에서 피가 나겠다 싶을 정도로 아이가 질문을 쏟아낼 때가 있다. 여섯 살쯤이 질문의 ‘양’으로는 최정상이었던 것 같다. 열한 살이 된 지금은 질문의 ‘질’이 달라졌다. '이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단순 질문이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듯 대답해 줄 수 있는데, 질문의 수준이 점점 높아진다는 것이 문제다. 가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생각나는 질문들을 마주한다.
"경찰도 거짓말을 하거나 나쁜 사람일 수 있어?"
"인간은 왜 사는 거야?"
"학교는 왜 있는 거야?"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왜 만들었을까?"
"허무와 침묵 중 어떤 것의 힘이 더 강해?"
"연대와 자유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해?"
대답을 하기 위해 일단 시간을 벌어본다. “엄마가 말하는 게 정답이 아니고 엄마도 잘 모르겠는데…”하며 우물쭈물 대면, 아이는 “난 그냥 엄마 생각이 궁금한 거야. 그냥 말해도 돼.”하며 대답을 재촉한다. 누가 아이에게 좋은 질문을 해야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다고 했나. 아이의 질문 때문에 도리어 내가 자라고 있는 판이다.
아이의 세상은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이에게 당연한 것은 없다. 아이의 질문을 들으며 내가 얼마나 많은 질문을 놓치고 살았나 생각하게 되었다. 질문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직전 회사에 입사했을 때, 내가 팀장이지만 팀 내 사원부터 과장까지 모두 이 회사를 오래 다닌 친구들이었다. 막 입사를 한 데다가 이미 꾸려진 팀에 팀장으로 들어간 터라 보다 의욕을 가지고 업무 프로세스를 세팅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팀원들에게 여러 차례 질문을 했다. 그때 대리에게 이런 답을 들었다.
“그거 원래 그래요. 어차피 안 돼요. 그냥 해야 해요.”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얼마나 힘이 빠졌던가. 이런 일이 반복되니 내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호해졌고 때로는 상처가 되기도 했다.
질문을 한다는 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는 건 아닐까. ‘학교는 왜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학생이 그 반대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다다르자 나는 아이의 가능성을 절대로 죽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 일곱 살 무렵이었나, 아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부모에게 바라는 점이 있는지.
"아빠는 앞으로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더 많이 해주면 좋겠고, 엄마는 내가 물어보는 거 더 잘 알려주면 좋겠어."
나에게 첫 번째로 바라는 일이라고 한다면 주저할 필요가 없다. 나는 아이에게 백과사전이자 말동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치앙마이 여행 중에도 여러 질문을 마주했다. 태국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은 왜 성격이 이렇게 다른지. 한국 사람들은 왜 항상 빨리빨리 하려고 하고 급한 건지. 밥값이 이렇게 싸면 태국 사람들은 돈을 어떻게 모으는지. 태국에는 사원이 많은데 왜 한국은 아닌지.
아이의 질문을 붙잡고 정답이 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종교와 기후, 산업화와 물가에 대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혹시 이런 것 때문은 아닐까’하며 말을 보탠다. 아이 덕분에 나는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을 고민하고, 고민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애를 쓴다.
여행이 내게 남긴 가장 큰 것은 생각을 나누고 생각을 발견한 순간들, 서로의 눈빛이 반짝였던 그 장면이다. 역시! 잊지 않기 위해 노트에 꾹꾹 눌러써 두길 잘했다.
허무, 침묵, 연대, 자유에 관한 질문은 쿠키런킹덤이라는 게임의 세계관과 연관이 있습니다. 게임에서도 배울게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