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에 오늘을 맡기기

여행기록_나에게 돌아가는 길

by 초록테이블

급히 잡은 여행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여행 가면 이건 꼭 해야 해!' 같은 건 크게 없는 편이다. 놀랍게도 계획형 J 인간이기는 하지만,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더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크고 두루뭉술하게 계획을 잡는 것 같다.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위한 스스로의 타협점 같은 거다. 여행 첫날의 큰 목표는 두 개였다. 우육면 먹기, 문화예술공간과 대형서점인 보얼예술특구&성품생활 가기. 두 가지 목표를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도록 멀지 않은 곳의 우육면 식당도 찾아두었다.


향원우육면이 유명하다고 해서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오! 여기도 괜찮아 보이는데? 간판이랑 느낌이 완전 로컬인데? 정말 식당 분위기가 괜찮기도 했지만 어쩌면 배가 고팠거나 더워서 멈춰 쉬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銘邦港園牛肉麵(명방항원우육면)이라는 이름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육면에 고기가 너무 많이 들어있다. 아니, 120 TWD (5,500원)인데 고기를 이렇게 많이 줘도 되는 건가? 물론 내가 사장님을 걱정할 건 아니고, 한국도 밥값이 좀 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서 이렇게 고기가 많이 들어있는 우육면이었으면 2만 원은 했을 거다. 부드러운 고기와 탱글한 국수를 야무지게 먹다가 절반 정도 남았을 때 다진 마늘과 고추기름을 넣어서 맛보았다. 이것도 괜찮다. 구글 리뷰를 찾아보니 기안84가 왔다 간 곳이란다. 기안84도 나처럼 그냥 우연히 들어왔는지, 방송국에서 확인해 본 맛집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같은 곳에서 식사를 했다고 하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든다.


보얼예술특구와 성품생활을 가고자 한 이유는 평소 서점과 문구점에만 가면 눈이 반짝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보통 책 좋아하고 끄적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벗어날 수 없는 늪이 아닐까. 밥도 먹었겠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보물섬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이름하여 'SKB'. since 1955,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만의 문구 브랜드란다. 굳이 SKB가 무슨 뜻인지 찾아본다. Smooth, Knowledge, Beauty. 오호! 유리문을 열고 매장을 들어가니 우드톤으로 꾸며진 매장에 온갖 필기구가 가득하다. 넓지도 않은 매장을 뱅뱅뱅 여러 바퀴 돌면서 천천히 음미하듯 펜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연필, 만년필, 수성펜, 유성펜, 색연필...... 서울의 내 책상 위 펜꽂이에 펜과 연필이 꽉꽉 채워져 있는 것이 자꾸만 떠올라서 펜을 손에 들었다가 내려놨다가를 반복한다. 아주 얇아서 내 글씨가 마음에 들어지는 0.05mm fineliner 3자루를 손에 쥔다. 이건 서울에서 문구점 갈 때마다 매번 재고가 없으니깐 꼭 필요한 거다. 그리고 아이 선물용으로 컬러펜 세트를 골랐다. 고동색, 보라색, 자주색, 금빛노란색, 스모크블루 등 특이한 컬러인데다 펜마다 단어가 쓰여있다. KIND, STRONG, TOUGH, LOVED, ELEGANT, BRAVE. 에너지가 필요할 때마다 의미에 맞는 펜을 꺼내 쓰라고 해야겠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아이가 마음에 안 들어하면 내가 써야지. 이렇게 생각하니 역시 잘 샀다 싶다.


한낮의 오후, 뜨거운 해를 받으며 걸었다. 곧게 뻗은 길에서 대만스러운 건물과 키가 큰 나무를 보고 청설모를 쫓는 고양이를 사진으로 남겼다. 갑자기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타들어갈 듯 뜨거운 태양 때문인지 꿈속을 걷는 것도 같고 뭔가 현실감이 없다. 돌아갈 생각을 하니 갑자기 막막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서 이상한 벅차오름이 느껴졌다. 사진 앱을 켜서 손가락 하트를 남겼다. 보얼예술특구로 걸어가는 뜨겁고 행복한 한낮의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


보얼예술특구에는 건물, 벽화, 조형물, 거리가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내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쉬워진다. 날씨가 선선했으면 여유롭게 둘러보며 낯선 사람에게 찍어달라 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이 건물들을 찍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터라 누구에게 부탁하기는 미안하다. 땀에 절어 아무렇게나 엉켜있는 머리카락을 말리기 위해 결국 에어컨이 있는 곳을 찾는다. 역시 대형서점인 성품생활이 시원해서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기대했던 곳이지만 아까 SKB에서 마음에 드는 펜들을 샀기에 당장은 딱히 살 것이 없다. 오늘 뭔가 하나도 계획대로 되지 않고 있다. 오늘의 여행을 우연에 맡긴 게 꽤 맘에 든다.

해외서점에 올 때마다 매번 생각하는 것이지만, 외국어로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한다. 최근에 중화권 작가의 책도 여러 권 읽고 있어서 괜히 낯익은 이름들도 찾아본다. 둘러보다 보니 몇몇 국내작가의 책들도 보인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여 있다. 해외의 큰 서점에 내 책이 있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한다. 뿌듯하면서도 부끄러우려나? 나에게 조용히 말해준다. '아예 불가능한 꿈은 아니야.'


땀을 식히고 나서 지도를 보지 않고 목적지 없이 걸었다. 걷다 보니 바다가 나왔다. 선글라스를 끼고도 눈이 부시지만 온몸으로 태양을 흡수하는 기분이 들어 에너지가 채워진다. 광합성을 하고 있나 보다. 바다 옆 너른 공원에서는 어린이들이 한가롭게 비눗방울을 불고 연을 날린다. 화려하고 쨍한 색깔의 연을 팔고 있는 사장님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시간을 보낸다. 철로를 따라 계속 걷는다. '예전에 철길이었는데 지금은 공원인가 봐.'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앞에 진짜 전철이 다니고 있다. 띠용! 노선도를 보니 이걸 타면 나의 숙소로 돌아가기가 아주 불편한 것 같다. (돌아와서 다시보니 이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지도를 잘 못 봤다.) 전철을 갈아타면서 힘들게 숙소로 갈 것인지, 좀 더 걸을 것인지 몇 초 고민하다가 걷기로 결정했다. 그냥 계속 걸었다. 아 죽겠다 싶을 때까지 걸었다. 다리가 저리고 무더워 목도 마르지만, 머릿속은 맑아지는 것 같다.



*읽은 책들 남겨두기*

최근에 읽은, 읽고있는 중화권 책들
우밍이 -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
류즈위 - 여신 뷔페
찬호께이 - 고독한 용의자
류츠신 - 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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