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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Apr 23. 2019

직장 생활 10년만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

Feat.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또 한 해가 가고 오네요.”


“당신 나이가 되면 모든 게

 선명해질까요?”


“아니요.”


“그럼 더 혼돈스러워지나요?”


“그냥 빨리 흘러가요.

 비 많이 왔을 때 흙탕물처럼.”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중에서.






1년 전쯤.


직장 생활 딱 10년만 해야지, 하고 결심했던 건 그 당시 유행처럼 번졌던 퇴사 열풍(?) 때문도,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라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한 것도, 그저 내년에 10주년을 맞이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직장 생활 10년만 해야지, 하고 주문을 걸듯 말했던 건 사실 ‘국민연금’ 때문이었다.


지난해 이사를 하며 독립을 했고, 처음으로 세대원이 아닌 세대주가 되었다. 세대주가 되고 나니 국민연금공단에서 꼬박꼬박 국민연금 납입 안내물을 보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 우편물에 적힌 시간,



102개월



내가 그동안 국민연금을 납부한 시간이자,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기간이었다. 앞으로 몇 년을 더 납부하면 내가 받을 수 있는 국민연금액이 얼마인지 시뮬레이션까지 해서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우편물에서, 나는 처음으로 국민연금에도 ‘최소 납입 기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10년



최소 10년만 채우면 국민연금을 수령할 자격을 갖는다. 인구 고령화나 국민연금 고갈 문제가 심각하고 또 실제 내가 국민연금을 수령할 때쯤 그 금액이 얼마나 소소할지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국민연금 납입 안내 우편물에서 이상한 위로를 받았다.




조금만 참으렴.

이제 곧 나라에서도 국민연금 받을 만큼 일했다고 인정해주는 10년이야.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다른 삶을 준비해도 돼.




노후가 불안해서 일한 건 아니었는데.

직장 생활 10년 하면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어쩌면 나는 기한을 정하는 것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했으니 그 끝을 정하는 일.




입사 후 6년 정도는 회사가 급변하며 성장하던 시기라, '실무'를 통해서 배우고 '회사'와 함께 성장하는 몰입과 성취감 속에서 꽤 '운 좋은' 직장 생활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그건 정말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러다 직장 생활 6년 차가 되면서부터는 크게 힘든 일도 없었고, 딱히 이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회사가 너무 좋아서라기보다, 그만둘 만큼 힘들지 않았다. 더 나은 회사야 있겠지만 조직의 생리는 어디나 비슷하기에 그 더 나음이 지금의 안정감이나 익숙함을 대체할 만큼 커 보이지 않았다.


우리 회사는 일반적인 대기업이 그렇듯 적당히 보수적이면서 적당히 변화를 추구하는 회사다. 조직문화도, 급여도, 업무 강도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모든 게 적당한 회사였기에 엄청난 성취감도, 엄청난 괴로움도 없이 적당한 만족과 적당한 스트레스 속에서 적당히 일과 삶의 밸런스를 맞추어가며 다니기에 적당한 회사였다.


회사의 비전이 궁금하면 선배들을 보라고 했는데, 조직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이 줄어드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대신 불행을 느끼는 것에도 무뎌져 있어 적당히 균형이 맞아 보였다. 저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뭐 꼭 나쁜 미래는 아니었다. 다들 저렇게 산다고 하면 그중 나은 축에 속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아니고 연못 속의 잉어 정도는 되어 보였다.


차라리 동기들과 회사 욕을 하기도 하고, 요즘 회사 어떠냐고 물으면 열변을 토하다 눈물이 나기도 했던 시절이 그리웠다. 요즘 동기들을 만나면 회사 얘기는 안 한다. 부질없다는 걸 모두가 안다. 회사 생활 어떠냐고 물으면 누가 묻든 간에 나는 말한다.


“나쁘지 않아요.”



나쁘지 않은데도 나는 자꾸 연못 밖 세상이 궁금했다. 나는 사실 잉어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었는데 연못에 잘못 온건 아닐까? 잉어가 맞더라도 연못 말고 잉어가 살 수 있는 다른 곳이 있지 않을까?



상상만 하면 알 수 없는 세상이었고, 생각만 하면 영원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국민연금 납입 안내문을 처음 받아 들고서 나는, 기한을 정하기로 했다. 끝을 정하기로 했다. 그래야 다른 시작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다른 무엇을 시작할지 정하는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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