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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May 21. 2021

[생각 23] 픽션을 위한 논픽션

 픽션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평상시보다 늦은 퇴근길. 똑같은 번호의 버스인데 퇴근 시간에서 조금 비껴갔다고 버스 안이 텅텅 비어있었다. 야근했음에도 버스에 고를 자리가 많다는 사실 하나에 속없이 또 조금 좋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버스 안을 가로지르며 눈으로는 빠르게 스캔을 했다. 어느 자리에 타야 텅 빈 버스를 만끽할 수 있을까? 맨 뒷자리와 버스 바퀴 때문에 무릎을 조금 구부려야 하는 자리를 선호하는 나는 그날따라 맨 뒷자리가 당겼었다. 바퀴 위 의자에 앉으려고 발을 디밀었다가 얼른 방향을 바꿔 맨 뒷자리 구석에 앉았다. 약간 더 높은 시야로 텅 빈 버스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탁 트인 시야 덕분에 야근으로 묻었던 짜증을 한 움큼 덜어냈다.


버스뿐만 아니라 도로도 퇴근 시간대보다 조금 한산했다. 무리 없이 달리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할 때마다 다양한 사람들이 버스 안팎을 오갔다. 조금 이상한 취미일 수 있지만, 종종 고양이처럼 맨 뒷자리 높은 곳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혹은 2층 카페 창가에서 책을 읽다가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을 반복하기도 했다. 소설을 쓴 이후부터 다양한 나이대나 직업군을  등장시켜야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의 1%도 채 보지 못하고 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 따라온다.


오랜만에 사람 구경(?)을 즐겼다. 간이 콩알만 하기에 사람을 직접 바라볼 자신은 없다. 허공 어딘가에 넋을 놓고 있는 동공으로 공터를 바라보며, 겨우겨우 곁가지 배경으로 사람들을 조금씩 담을 뿐이다. 그리고 자주 버스에서 사람 구경을 하다 보면 뒤통수를 가지고도 혼자만의 놀이가 시작된다.


고개가 한쪽으로 기우뚱한 뒤통수를 보면 저 사람은 오늘 피곤함을 그득 안고 버스에 탔구나. 아. 취하셨네. 넥타이 떨어져요! 아저씨. 아가야. 그러다 다칠 것 같은데. 엄마가 이미 많이 지쳐 보이시는데 얌전히 앉아서 뽀로로 보면 안 될까? 벨은 이따가 아가가 꼭 누르게 해줄게. 오늘 버스 기사님은 파이팅이 좋으시네. 엄청 달리시는데? 곧 있으면 엉덩이가 하늘에 닿겠어 허허. 오늘은 맨 뒷자리 스릴을 제대로 즐기겠는데.


표정이 멍한 대신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잡생각이 떠돈다. 그리고 지금처럼 소재를 마구마구 적는다. 버스에서 나왔던 노래를 듣고 떠올린 생각, 사람들을 보며 느낀 생각, 그 속에서 있는 나는 어떤가에 대한 생각, 술 냄새를 따라온 고깃집에서의 에피소드 등등. 복작복작한 환경에 있으면 그만큼 소재가 많이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게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집 밖을 자주 나오는 타입이 아닌지라 이렇게 본의 아니게 밖에 나오는 (이 사람은 퇴근 중이다.) 일이 있으면 그때밖에 기회가 없다. 소재가 갤러그 게임처럼 쏟아질 때 열심히 메모장으로 받아내지 않으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그러다가 소설 속 등장인물과 딱 떨어지는 인물이라도 나타나면 그날은 수지맞은 날이 되기도 한다.


아직은 관찰능력이 부족하기에 많은 것을 끌어내지 못하는 초짜 사회인이라 실수도 잦다. 부랴부랴 적고 나서 나중에 메모를 다시 펼치면, 그래서 이 소재를 어떻게 사용하지? 라며 고민하다 결국 삭제되는 아이템도 수만가지다. 아직 내 생각조차 가지런히 풀어놓지 못하는 나를 보며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지만, 가끔 술술 풀리는 날에는 머리카락이 바짝바짝 설 정도로 기분이 좋은 날도 뒤따른다. 평범함 속에서 나만의 말투로 평범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꺼낼 수 있는 날까지, 픽션을 위한 논픽션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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