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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 Sep 25. 2020

데이트하다 얼어 죽어도 범인은 있겠지

<살인의 쌍곡선> (니시무라 교타로 | 한스미디어 | 2020)

"이제 버스가 올 때가 됐는데......."

그랜드 하얏트 호텔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 저녁 8시가 넘은 시각. 나는 버스가 올 방향을 눈여겨보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유독 한파가 많이 왔던 겨울. 그 겨울 어느 토요일의 이태원이었다. 옆에서 지화가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하면서도 민망했다. 하필 이렇게 추운 날 약속을 잡아서 지화를 추위에 떨게 하는 것 같았다. 




© betagamma, Unsplash



지난 송년회 모임 때 책 한 권을 주고받은 것을 계기로 나와 그녀는 조금씩 연락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녀 이름이 '지화'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명한'이라는 내 이름도 알려주었고. 한창 바쁜 연말연시라 연락만 하고 자주 보지는 못하며 '썸'만 타는 사이로 남을까 봐 초조해했는데 이렇게 간만에 번듯한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날이 이 모양이라니. 근사하게 짜 놓은 계획이 추위에 틀어지고 있다.


옆에서 지화는 따뜻한 차가 든 종이컵을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여기 버스정류장으로 오기 전에 차를 마셨던 카페에서 계산을 하고 나올 때 카운터에서 받아 온 것이다. 처음에는 뜨거운 음료를 주길래 들고 가기 거추장스러울 거라 생각했는데, 지화가 추위를 많이 타는 걸 보니 뜨거운 게 다행이다 싶었다. 뜨거웠던 차는 벌써 미지근해지려는 참이었다. 저렇게 소중하게 꼭 붙들고 있는 걸 보니 추위를 참 많이 타는구나 싶어서 핫팩이라도 잔뜩 선물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오네요, 버스."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겨우 4,5분 기다린 셈인데 몇십 분 있었던 것 같다. 버스에 올라타 이동한 곳은 이태원 중심부에 있는 막걸리 전문점. 이전에 지화와 이야기할 때 막걸리를 좋아한다길래 미리 알아둔 곳이었다. 간단히 안주거리와 망고 막걸리를 주문했는데, 아뿔싸. 살얼음 동동 떠있는 막걸리라니. 이 추위에. 


낭패였다. 오늘 기분 좋은 느낌이 들어 지화를 만나면 멋진 서울 야경도 보여주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이 토요일 밤을 보내고 싶었는데, 이렇게 날씨가 추울 줄은 예상 못했다. 얼마나 추웠냐면, 추위를 잘 안 타는 나조차도 이 날씨에 이렇게 찬 막걸리를 먹으니 '시원하다'라기보다는 '서늘하다'라는 감상이 들 정도. 그 겨울의 추위는 역대급이라는 말이 많이 나올 정도로 기억되었으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시리라.


그래도 지화는 '참 맛있네요, 이 막걸리'라며 연신 술잔을 비웠다.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두 병을 비우고 세 번째 막걸리를 주문했다. 술은 차가웠지만 그래도 먹다 보니 알큰하게 술기운이 올라왔고 주변에 꽉 들어찬 사람들 속에서 술집도 후끈해졌다. 아주 망한 데이트는 아니었다. 얼어 죽을 것 같은 날이지만 그래도 만나길 잘한 것 같다.





폭설에 갇힌 추리소설들

                                        

한 겨울의 추위이나 폭설을 배경으로 하는 추리소설은 은근히 많은 것 같은데, 막상 찾아보려고 하니 어떤 책들이 있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많은데. 어쩌면 <명탐정 코난> 또는 <소년탐정 김전일> 만화책에서 자주 일어나는 '폭설에 갇힌 산장에서의 살인 사건'이라는 추리소설(만화)의 단골 클리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겨우 머리를 굴려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것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덫>과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있다. 이 중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폭설을 배경으로 하는 추리소설 중에 가장 유명한 게 아닐까 싶다.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가 오리엔트 급행열차를 탔는데 폭설로 열차가 멈추고 승객 한 명이 살해되어 발견된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벌어진 밀실 살인을 마주친 명탐정의 활약과 기막힌 반전으로 유명한 바로 그 추리소설이다. 무섭도록 내리는 흰 눈 속을 달리는 특급열차 속 사건은 한 겨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추리소설이라 할만하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원작자인 <월관의 살인> 도 한 겨울 눈보라 속 열차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만화)고,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은 제목부터가 겨울 추위를 연상시키고, 우타노 쇼고의 <흰 집의 살인>, 시마다 소지의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등도 겨울 배경과 눈이 떠오르는 작품들이다. 추리소설 공장장이 아닐까 의심되는 그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질풍론도>, <연애의 행방>, <눈보라 체이스> 등의 (추리적 요소가 조금 적은) 소설도 마찬가지. 


<살인의 쌍곡선> | 니시무라 교타로, 이연승 역 | 한스미디어 | 2020


폭설과 쌍둥이가 등장하는 <살인의 쌍곡선>

                                                                        

그리고 니시무라 교타로의 <살인의 쌍곡선>도 대표적으로 눈에 갇힌 집(호텔)을 배경으로 일어난 살인 사건을 그리고 있는 추리소설이다. 사실 이 소설은 배경으로 겨울과 폭설이 나올 뿐이지 그보다는 쌍둥이를 활용한 트릭이 더 유명하다. 


아, 이 소설은 1970년대의 일본이 배경이다. 처음에 읽다가 어랏? 하면서 위화감을 느꼈는데 시대 배경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휴대폰도 없고 인터넷도 안 나온다는 이야기다. 


제목이 '살인의 쌍곡선'인데, 두 개의 곡선이라는 의미를 그대로 활용할 셈인지 소설은 처음부터 두 가닥의 사건을 동시에 늘어놓으며 시작한다. 하나는 도쿄에서 쌍둥이 형제에 의한 연쇄 강도 사건, 그리고 또 하나는 '관설장'이라는 호텔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이다


먼저 호텔 쪽 사건을 보자. 관설장이라는 호텔에 도쿄에서 6명의 손님이 도착한다. 이들은 호텔에서 무료 숙박 및 여행 초청을 받아 왔는데, 서로 일면식도 없으며 자신에게 왜 이런 무료 숙박 기회가 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사건에서 너무(?) 당연하게도) 눈 때문에 호텔은 고립되었고 지원과 탈출을 기다리는 사이 한 명씩 살해당하기 시작한다. 시체 옆에는 범인이 놓아둔 것으로 보이는 메시지가 적힌 카드가 있고, 오락실의 볼링 핀은 시체가 늘어감에 따라 하나씩 사라진다.


도쿄의 연쇄 강도 사건은 쌍둥이 형제에 의한 것이다. 일란성쌍둥이 중 누군가가 가게에 들어가 강도짓을 했고 증인도 증언도 분명히 있는데 대체 형제 중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가려낼 수 없어 경찰이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두 개의 사건이 동시에 진행이 된다. 이 동떨어져 보이는 사건이 어떻게 이어지는 건지, 각 사건의 트릭은 무엇인지 파헤치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호텔의 연쇄살인 내용을 보면, 떠오르는 유명한 소설이 있을 것이다. 바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 소설을 오마주 했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고립된 호텔, 한 명씩 죽어가는 손님, 그리고 사라지는 볼링핀. 그러나 이 소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의 물꼬를 틀어 나가기 때문에 읽어보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는 다른 영리한 소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작가의 도전장 혹은 초대장

                                            

참, 소설 첫머리에는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도전장...이 아니라 힌트... 아니면 초대글(같은 것)이 있다. 작가는 대놓고 "이 추리소설의 메인 트릭은 쌍둥이를 활용한 것입니다."라고 독자에게 말한다. 사실 쌍둥이 트릭이란 걸 알아도 범인과 트릭 맞추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작가의 트릭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범인의 '동기'를 예측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밀실, 연쇄살인, 쌍둥이 트릭, 알리바이 공작 등 각종 추리소설의 매력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만 사건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밝혀지는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야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던 주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결말 부분에 이르러 사전의 진상이 완전히 드러나고 여기까지 잘 따라오며 읽게 되는 추리소설이야말로 독자가 바라는 추리소설의 모습일 터. 게다가 여기에는 마지막 쪽까지 작가가 반전을 남겨두었기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는 묘미가 좋았다.


2020년 현재의 독자가 보기에는 어쩌면 좀 뻔하고, 어디서 다 본 듯하고, 이미 많이 알려진 내용이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설이 본래 1971년에 나온 것이었음을 돌이켜 생각하면, 아마 좀 뻔하고 어디서 본 듯한 내용들의 '선배 격'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사당행 방향 지하철 운행 종료했습니다."

삼각지역 역무원이 6호선에서 4호선으로 환승하려는 우리를 막아섰다. 주말에는 조금 더 일찍 지하철 운행이 끊긴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술자리가 워낙 즐거워서 한 잔 더, 한 병만 더, 조금만 더 마시고 즐기다 보니 막차 시간을 놓쳤다. 나야 걸어서 가든 뛰어 가든 집에 갈 수 있지만, 조금 멀리 사는 지화에게는 다소 난감한 일이다. 옆에서 지화의 표정을 슬그머니 보니, 얼굴에 난감함과 당혹감이 복잡하게 묻어있다. 미안함이 몰려왔다. 


"택시 잡아 줄게요, 같이 가요."

나는 택시를 잡아 지화와 같이 타고 가려고 했다. 밤도 늦었고 둘 다 술기운도 얼큰히 올라오고 있는 데다 나 때문에 늦어진 거니. 그렇지만 거절의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결국 지화는 내 제안을 뿌리치고 혼자 갔다. 머쓱해진 채로 택시 번호도 외울 겸 택시 뒤꽁무니를 한참 바라보며 그녀를 보냈다. 술도 조금 깰겸 오늘 데이트의 여운도 느껴볼겸 서울 밤거리를 혼자 걷자니 날은 춥고 술기운에 머리는 후끈했다. 혹시 뭐 내가 실수한 것은 없었나. 택시 탄 지화의 표정이 어땠었나.  아까 그 농담에 혹시 기분이 나빴나. 나만 술자리가 재밌었던 건 아니었겠지. 


걸으면서 온갖 망상에 잡상을 하고 있는데 호주머니에서 소리가 울렸다. 지화에게서 온 문자였다. 문자를 보고 생각했다. 얼어 죽을 것 같아도 연애가 시작되는 날이네.

- 우리 오늘부터 사귈래요?




니시무라 교타로라는 작가를 떠올리면 '꾸준함' 그리고 '기차'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1930년생인 그는 매일 원고를 펜으로 쓴다고 한다. 집필한 소설이 몇 백 권이라는데 국내에는 많이 번역되어 있지 않다. <종착역 살인 사건>, <명탐정 따윈 두렵지 않다>, <살인의 쌍곡선> 정도인 듯하다. <종착역 살인 사건>은 일본의 기차 시스템을 잘 알면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테고, <명탐정 따윈 두렵지 않다>는 고전 추리소설의 팬이라면 누구든 단번에 읽어버리지 않고는 못 배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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