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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 Sep 21. 2020

시작은 평범하게 밀실살인으로

<일곱 개의 관> (오리하라 이치 | 한스미디어 | 2015)


"어, 신간이네요?"

"네! 한 번 보실래요?"

나는 대뜸 책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왁자지껄하다 못해 말소리가 쿵쿵 울리는 치킨집이었다. 핀 조명 아래서 나는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연말 모임이 한창 진행되어 사람들의 기분과 흥겨움이 고조되어 있는 상태. 연남동 부대찌개 집에서 이미 회식 1차를 끝내고는, 남은 이들은 2차를 하자며 치킨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4인용 테이블을 여러 개 이어 붙여 놓고 사람들은 그 주변에 둘러앉아 담화를 길게 이어가고 있었다.




© alelmes, 출처 Unsplash



이 모임은 추리소설 독서회의 송년회. 회원들은 매달 정해진 추리소설 책을 읽고 모여서 토론을 했다. 추리소설 마니아들의 모임이라 그런지 오고 가는 감상과 비평 내용이 꽤나 신랄하고 솔직했다. 이 독서회를 우연히 알게 된 후 매달 추리소설 읽는 새로운 재미를 더해가고 있었다. 


좋아하는 추리소설을 정독하면서 혼자서 감상하고 즐기고 정리하는 것을 넘어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의견 교환을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다니. '이런 게 취미생활의 진정한 확장이지!'라고 생각했다. 제1회 독서회에 참석한 후 매달 결석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열렬하고 성실한 회원이 되기로 했다.


그때는 단순히 책만 읽게 될 것이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새로운 일이, 내 인생을 바꿔버릴 사건이 생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책이 아닌 사람이. 


세 번째 독서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젊은 남자가 모임회에 있는 것을 보았다. 내 또래처럼 보였다.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간 내 주변에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또래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인기가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의외로 쉽지 않다. 일단 내 주변에는 거의 없었다. 가령, 누가 나에게 취미에 대해 물어본다면 대화가 대개 이렇게 진전된다.

- 취미가 뭐예요?

- 저는 추리소설 읽는 걸 좋아해요.

- 아...... (대화 끊김)

이런 대화가 대부분이었고 간혹은

- 아! 저도 명탐정 코난 좋아해요!

이런 정도의 대답이 오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니까 추리 탐정 만화를 알고 좋아하는 사람은 많은데 추리 '소설'을 좋아한다는 사람을 만나보질 못했다. 정말이지 의외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중에서도 내 또래는, 주변 인물은 없.었.다.


그래서 늘 혼자 추리소설을 탐독하곤 했던 터라 추리소설 독서회가 생긴다는 말에 신나서 왔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내 또래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가 참석한 것이다. 오호라. 


단번에 흥미가 갔지만 인연이 아니었는지 독서회를 시작한 지 2년이 되도록 그 남자와 말을 붙일 기회가 생기진 않았다. 내가 그렇게 숙맥이거나 소심한 성격은 아닌데도 말이다. 말을 붙일 기회는 2년이 지난 후 바로 이 송년회 자리에서 생겼다.


"이 책 제목 보고 끌리긴 했는데, 다 읽으셨어요?"

"네. 단편 모음집인데 꽤 괜찮더라고요. 밀실 사건만 다루고 있어요"

살짝 기분 좋은 긴장감과 설렘이 들면서 계속 대화를 이어가려는 찰나, 테이블 저쪽 끝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괄괄한 목소리를 가진 K였다.

"그거 신간 아닙니까? 저도 좀 보여줘요."

아. 왜 하필 이 시점에. 지금 이 남자랑 대화를 잘 이어갈 참이었는데.

그래도 거절할 순 없어서 테이블 반대편 쪽으로 책을 건넸다. K는 책을 이리저리 들춰보며 말을 이었다.

"와. 이 책 서점에서 보고 살까 말까 했던 건데. 오늘 책 나눔하려고 갖고 오신 거예요? 내가 가져갈까."


아니, 그러지 마세요. 







밀실 살인은 많을수록 좋지

                                               

모임 하루 전. 송년회에서 책 나눔을 한다길래 급하게 신간 서적을 샀다. 하루 밤에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내용이 흥미롭고 제목이 눈에 끌려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것으로. 그래야 그 남자가 모임에 참석한다면 이 책에 관심을 가져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고른 책이 일본 작가 오리하라 이치의 <일곱 개의 관>이었다.



<일곱 개의 관-밀실 살인이 너무 많다>오리하라 이치 | 한스미디어 | 2015



'일곱 개의 관'. 책 표지에 있는 원제목을 보니 시체를 담는 궤를 의미하는 그 '관'이었다. 일곱 개의 살인 사건을 의미하는 제목인가. 제목보다는 부제에 더 끌렸다. "밀실 살인이 너무 많다." 캬. 추리소설 팬이라면, 소년 탐정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밀실 살인은 많을수록 좋지, 무슨 말이야 싶을 거다. 

 

제목처럼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밀실의 왕자(王者)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들

불량한 밀실

그리운 밀실

와키혼진 살인사건

불투명한 밀실

천외소실(天外消失) 사건


일곱 편의 단편은 도무지 사건이라고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밀실추리소설의 광팬인 경감이 맞닥뜨리는 일곱 개의 기이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매우 일상적인 것 같지만 실상은 괴이한 사건과 기발한 것 같지만 실상은 알고 보면 별 거 아닐 수 있는 트릭들이 나온다. 


주인공 겪으로 등장하는 경감은 존 딕슨 카와 추리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모든 사건을 밀실과 트릭에 맞추어 생각하려고 한다. 어떻게든 공을 세워서 다시 도쿄로, 본청으로 돌아가는 걸 꿈꾸지만 매번 사건 해결은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흘러가는 게 이 책이 주는 웃음 포인트라 하겠다. "밀실 사건이에요, 경감님!"이라는 말에 마을에서 일어난 각종 살인사건을 어떻게든 풀어보려 애쓰는 경감에게 안쓰러운 응원을 보내면서 책을 읽다 보면 금세 소설의 내용에 푹 빠져 있기 마련이다. 


제각기 다른 성격의 밀실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리운 밀실'이 가장 흥미진진했다. 그 내용을 잠깐 훑어보면 이렇다.


//

유명 추리소설 작가가 절필을 선언하고는 자신의 집(밀실)에서 사라졌다. 작가는 2년 후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기에 작가를 맞이하러 편집자들이 꼭 2년 후에 그 집에 모였다. 약속된 그 날, 사라졌던 작가가 '밀실'인 집에서 나타났다. 목이 잘린 시체가 되어.

//


자자, 그러니까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이런 설정만 보고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거다. 한 번은 잠적, 다른 한 번은 살인으로 이어진 같은 밀실에서 일어난 두 번의 기이한 사건. 이런 설정이라면 난 언제든지 환영이다. 


이외에도 '밀실의 왕자'는 다소 엉뚱하지만 그럴듯한 살인사건의 진상이 돋보였고,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들'은 이중으로 만들어진 밀실의 재미를 보았다. '불량한 밀실'을 읽으면서는 어쩐지 킥킥대며 웃었고, '와카혼진 살인사건'은 범인의 정체가 가져다주는 재미를, '불투명한 밀실'은 제목이 가진 의미를 다시 보게 되었고, '천외소실 사건'은 복잡하지만 실상은 단순한 인과에서 매력을 느낀 이야기였다.




밀실의 팬입니다

                              

추리소설의 범위는 넓고 정의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탐정이 등장해서 난해하고 불가사의한 사건을 명석한 두뇌로 해결해 간다는 것을 추리소설의 큰 재미 중 하나로 본다면 역시 '밀실'이 주는 재미를 놓칠 수 없다. 


나는 밀실 살인 사건의 팬이다. 범인이 들어갈 수 없거나 빠져나올 수 없는 공간에서 살인이 일어난다니. 과연 사건의 진상은 무엇이며 탐정(혹은 탐정 역을 맡은 인물)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궁금해 하며 읽는 게 즐겁다. 추리소설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하지만 밀실이 등장한다면 그 어떤 종류의 밀실이었건 일단 보는 편이다. 추리소설 팬이라면 밀실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터.


아무리 작가가 창작하는 이야기라도 그럴듯한 밀실은 만들기도 어렵다. 그런데 이 책에는 공간적으로 갇혀 있는 밀실이든, 심리적으로 만들어진 밀실이든, 착각이 만든 밀실이든 다양한 밀실 사건이 등장하니 나 같은 가벼운 추리소설 팬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아마 그 남자가 송년회에 참석한다면, 내 예상과 기대감이 맞다면, 그도 이 책에 충분히 관심을 보일 것이었다.


이런 기대감을 안고 이 책을 사서 하룻밤에 꼬박 읽고 송년회에 들고 간 것이었다. 








책을 구경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책을 주거니 받거니 돌려보면서 책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들리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저 K나 다른 누군가가 이 책을 가져가 버릴까 조마조마했다. 치킨집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도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 책을 지금 누가 보고 있고 누가 들고 있는지에만 집중했다.


"저도 아직 다 못 봐서요. 다시 좀 주실래요?"

그때, 그 남자가 웃으며 테이블 맞은편에서 책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아, 그래요. 여기요."

책이 다시 그 남자의 손에 들어왔다. 남자는 책을 이리저리 뒤적여 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이거 제가 가져가서 봐도 될까요?"


씨익. 그래, 바로 이런 전개가 되길 바랬던 거지.

"그럼요. 가져가세요."

나는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듯한 태도로 보였기를 바라며) 대답했다.

이 책이 우리 사이의 연결 고리가 되기를 바라면서.







작가 오리하라 이치는 '도착(도착:倒錯. 1. 뒤바뀌어 거꾸로 됨. 2. 본능이나 감정 또는 덕성의 이상(異常)으로 사회나 도덕에 어그러진 행동을 나타냄) 시리즈'로 이름을 알렸다. 이 시리즈의 소설 제목은 이렇다.  <도착의 론도>, <도착의 사각>, <도착의 귀결>. 상당히 매력적인 서술 트릭 소설인데 읽다 보면 어느새 작가가 유도하는 혼돈과 트릭의 늪에 빠져 있게 된다. 서술 트릭으로 유명한 추리소설들이 많은데  예상 못한 반전과 결말의 매력에, 서술 트릭 소설을 꼽을 때 으레 생각나게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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