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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 Sep 17. 2020

[프롤로그] 추리소설의 제목, 그 남자의 첫인상

<반전이 없다>  조영주 | 연담L  | 2019

"이 책 재밌어 보이지 않아?"


흐리던 어느 날 광화문 교보문고. 문구 코너를 지나 신간과 베스트셀러를 순위별로 전시한 코너 뒤쪽에 가면 추리소설만을 모아 둔 자리가 있다. 여기 교보문고에 오게 되면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매우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오곤 한다. 추리소설 신간이 뭐가 있는지 요즘에는 어떤 책들이 나오는지 보기 위해.


그 날 우리 눈에 띈 건 이 책이었다. <반전이 없다>. 책은 만화책이나 잡지처럼 비닐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책장을 휘리릭 넘겨볼 순 없었다. 나는 이 책을 들고 명한에게 말했다. 이 책 재미있을 것 같냐고.


"반전이 없다? 제목이 참신한데?"

"그렇지? 추리소설 코너에 있으니 추리소설인 건 분명한데, '반전이 없다'라니. 추리소설이라면 으레 반전이 있기를 기대하고 보게 되잖아. 독자의 기대를 역설적으로 더 키우는 제목이네."

"'이만하면 읽고 싶어질 텐데, 어디 니가 안 읽고 배길 수 있겠어?'라고 독자를 유혹하는 건가."


어떤 내용인지 어떤 분위기의 소설인지 가늠해보고 싶었다. 보통은 책날개에 있는 저자 소개를 읽고, 혹시 추천사나 번역가의 감상 등이 있으면 읽어보고, 소설을 두세 쪽 읽어보는 편이다. 그러나 책을 비닐로 싸놨으니 책 표지와 뒷 표지에 있는 문구들로 어떤 소설인지 유추해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앞표지에는 "이 책들요, 누가 반전만 찢어갔어요."라는 문구와 작가의 수상 내역이 적혀 있다. 뒤표지를 보니 이 소설을 소개하는 글이 있다. "추리소설을 싫어하는 살인마와 안면인식 장애를 앓고 있는 형사의 숨 막히는 심리 싸움"이라고.


"안면인식 장애라. 나름 흥미로운 설정이네. 안면인식 장애가 있는 형사가 범인을 눈 앞에서 놓치고 고군분투하는 내용인가?"

명한이 말했다.

"살인마가 추리소설을 싫어하고 추리소설에 원한이 있어서 추리소설 작가를 죽이는 스토리일지도 모르지."

내가 운을 맞추듯 말을 받았다.

"흥미진진할 것도 같으니 일단 사서 읽어보는 건 어때?"

명한은 내 제안에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응. 그래."

늘 그렇듯 눈주름을 잡고 웃는 얼굴로.





아직 추위가 가득했던 몇 년 전의 초봄. 3월. 모임 장소에서 나는 눈웃음이 선한 남자를 만났다. 스키점퍼를 입고 있어 그다지 세련된 차림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남자의 인상이 깊게 기억에 남았다. 특히 눈가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시원하게 웃는 눈웃음이.


다시 몇 년의 시간이 지난 2015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그 남자의 제안으로 막 개봉한 영화 '스타워즈 7'을 보기로 했다. 모임에서 말고 개인적으로 둘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 영화가 2시에 시작이니까, 1시 반쯤에 카페에서 만날까요? 영화관 있는 건물 2층에 '런던'이라는 카페가 있어요. 거기서 만나요.

- 좋아요. 그곳으로 갈게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고 나는 긍정의 대답을 보냈다. 남자 사람과 영화를 보는 것은 매우 오랜만이었다. 몇 년 만인가 싶었다. 조금 설렜다.


약속 시간에서 몇 분 정도 지났을까. 치마를 입을까 바지를 입을까 고민하다가 조금 늦게 출발했더니 제때 도착하지 않는 지하철이 야속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약속에 늦어 첫 데이트, 아니 첫 만남의 인상을 망치고 싶지 않아 조금 뛰었던 나는 숨을 고르며 만나기로 한 카페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그 남자의 눈웃음. 문을 등지고 앉아있던 그는 의자 등에 기대어 상체를 돌리고는 들어오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나는 어떤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일지 판단할 때 가장 먼저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첫인상. 그 첫인상을 차지하는 것이 외모든, 웃음소리든, 목소리든, 옷차림이든, 태도든 역시 느낌과 매력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가장 큰 부분이다. 소설로 치자면 제목이나 다름없다.


한 번 읽고 싶어지는 제목의 책처럼, 알아가보고 싶은 남자였다.


잘 지은 제목은 소설 내용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왕이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살짝 힌트를 흘리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제목이라면 일단 읽어보고 싶어진다. 물론 제목이 소설의 수준이나 재미를 정해주는 건 아니기 때문에, 책을 끝까지 다 읽어 봐야 할 테지만.


이 사람은 어떨까? 첫인상이 가져다 준 이 기분 좋은 예감이 잘 맞을까? 제대로 온 신호일까? 아니면 제목만 기발하고 내용은 기대에 못 미치는 소설처럼 인상만 좋을 뿐, 나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상대일까?


일단 책은 읽어 봐야 하고 사람은 만나봐야 아는 법. 나는 그와 마주 앉았다. 이 좋은 느낌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어쩌면 우리 만남에 반전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분 좋은 반전이든 기막힌 반전이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책은 제목을 참 잘 지었다. 추리소설이라면 으레 반전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반전이 없다>라니. 추리소설 팬이라면 호기심에서라도 과연 작가가 얼마나 머리를 잘 굴렸는지 확인해 볼 겸이라도 책을 읽게 될 것이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살고 있는 형사 이친전. 형사 경력에 잔뼈가 굵었지만 안면인식 장애를 겪으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휴직 중이다. 어느 날 동네의 한 노인이 천장이 무너져 깔려 죽었다는 사건과 마주친다. 책이 잔뜩 쌓여 있는 그 집에 가보니 피해자는 얼굴이 뭉개져 있다. 대여섯 권의 추리소설책을 묶은 책 뭉치로 얼굴이 뭉개져 있던 것. 게다가 살해도구로 쓰인 책들은 모조리 반전 부분만 싹 찢겨 있었다.


//

친전이 의아한 표정으로 책을 바라보자 나영이 덧붙였다.

“책으로 사람을 때려죽인 살인자가 살해 도구로 사용한 책의 반전을 몽땅 떼어간 걸로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에요.” (48쪽)                                                                                        

//                                                                                                                                          


그러니까 안면인식 장애를 앓고 있는 형사가 있는데, 그 형사는 추리소설 마니아고,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으며, 그 살인사건 현장에는 추리소설책이 있는데 그 책으로 사람을 때려죽였고, 게다가 그 책의 반전은 모조리 뜯어간 그런 사건이다? 이쯤 되면 추리소설을 위한 추리소설에 의한 추리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과연 이 안면인식 장애 형사가 어떻게 사건을 해결해 나갈지를 기대하면서 책을 읽어 나갔다. 읽다보니 작가가 추리소설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실제로 존재하는 익숙한 추리소설 제목들과 관련 출판사들, 작가 이름이 살짝 변형되어 등장한다. 말하자면 리문출판사라든가, 초이세라는 작가라든가. '리문출판사라니. 해문출판사를 조금 바꿔 만든 이름이잖아!'라며 키득키득대며 읽게 되었다.추리소설 팬이라면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출판사, 작가, 책 제목을 보면서 이 소설에 대한 흥미가 더 살아나기도 했다. 앞에 쓴 문장을 조금 고쳐야겠다. '추리소설을 위한 추리소설에 의한 추리소설 팬을 노리고 쓴 추리소설'이라고.


연속 살인사건이 등장하지만 (게다가 책으로 얼굴을 뭉갰다고도 하는데도) 이 추리소설은 잔인하거나 냉혹하거나 쫄깃하거나 그렇진 않다. 그보다는 좀 귀엽달까. 익숙한 동네가 배경으로 나오고 주인공인 형사는 무뚝뚝한 것 같지만 정 많은 할아버지고 주변의 조력인들도 툴툴대지만 다 성심성의껏 도움을 건네는 사람들이라 그런 듯하다. 주인공과 짝을 지어 다니는 김나영 형사도 처음 등장했을 때는 쌀쌀맞고 감정 부족한 도시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속 깊고 정 많은 캐릭터였다.







"자, 이제 영화 보러 가요. 시작 시간 다 되어 가네요."

"잠깐만요."

남자는 옆자리에서 커다란 종이백을 들더니 내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나는 갑자기 선물을 받아 들고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며칠 전에 생일이었다면서요."

아. 지나가듯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는 기쁘고 고맙고 긴장되고 설레고 미안하기도 한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남자가 계속 말했다.


"별 거 아니에요. 한 번 열어봐요."

제법 큰 상자에는 커다란 망토처럼 입을 수도 있는 목도리가 들어있었다. 따뜻한 붉은색의 체크무늬가 곱게 눈에 들어오는 목도리였다. 그리고 목도리 위에는 카드가 위에 놓여 있었다.

"추위를 많이 탄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요."

남자의 말에 좋은 표정을 감추지도 못하고 카드를 열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단순한 글귀. 내용은 짧았지만 단정하게 잘  쓴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글씨를 잘 쓰는 남자가 내 이상형의 한 조건이었다. 그런 말을 이 남자에게 한 적도 없는데 예상치 못하게 그런 남자와 마주 앉아 있게 되었다. 글씨를 단정하게 잘 쓰는 사람을 본 적이 많이 없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 그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남자를 만나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나에게 전하고 싶다. 이것 역시 반전이라면 반전. 아니면 반전이 아니라서 반전이라고.







추리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는 절대 하지 않는 행동이 있다. 바로 추리소설을 다 읽기 전에 마지막 페이지를 먼저 보고 결말을 확인하는 것. 범인이 누군지, 트릭은 무엇이었는지, 사건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미리 알고 보는 건 추리소설에 대한 독자의 배신이요, 독자의 게으름이요, 독자의 자격 상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경우는 소설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져 맨 뒷장을 넘겨보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들기도 하지만. 끄응.)


나는 이 남자와의 만남이 어떤 결말로 매듭지어질지 궁금했다. 헤어짐으로 끝날 수도 있고, 둘도 없는 친구로 남을 수도 있고, 어쩌면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법. 사람의 관계라는 게 만남과 '썸'을 거쳐 연인으로 또는 부부로 나아가는 게 보통의 전개일 텐데, 이 전개를 모조리 건너뛰고 결말부터 확인할 수는 없다. 마치 추리소설의 결말을 미리 넘겨 읽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과연, 나는 앞으로 어떤 추리소설들을 만나게 될까?
그리고 이 남자와는 어떤 인연을 맺게 될까?


책 제목들을 읽다 보면 마치 운명처럼 느낌이 오는 경우가 있다. 분명히 재밌을 거라는 기대감이 오는 그런 책.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 이 남자와는 처음부터 잘 맞을 거라는 운명 같은 기대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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