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마지막 목요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을 날씨 답지 않게 오늘도 한낮에는 늦더위가 있을 거라는 예보가 있다.
오늘은 두 달 전에 가려고 시도했다가 도중에 포기했던 호암늘솔길을 다시 찾아가 보려 한다.
소나무가 늘 있다고 하여 “호암늘솔길”이라 부르는 이 길 이름은 금천구청에서 공모하여 선정된 이름이라는데 매우 유혹적인 길 이름이다. 특히 솔바람과 숲그늘이 절실한 요즘 같이 더운 날씨에 말이다.
단체 톡방에 호암산에 간다고 공지하니 처음에는 반응이 없다가 무장애데크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나중에 참가신청자가 늘어났다. 공원이 아니라 산길을 걷는다고 하면 둘레길이라고 해도 친구들이 긴장하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오늘 만나기로 한 금천구청역 1번 출구에 12명이 나타난다.
호암늘솔길이 호압사 앞에서 시작된다고 하니 마을버스(01번)를 타고 우선 호압사입구까지 간다. 마을버스에서 내리면 큰길 건너편으로 호암산과 호암산문이 보이고 호암산문 앞에는 호압사라고 새겨진 큼직한 표지석이 서 있다. 이곳에 입구를 나타내는 문이 있으니까 곧 호압사 법당이나 주차장에 이를 줄 알았으나 문을 지나고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는 길 옆의 숲이 좋기는 하지만 경사도가 꽤 높은 길이어서 숨이 차고 땀도 많이 난다. 호암산 높이가 393 미터라는데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높은 산중에 절을 짓고 불공을 드리러 다녔을까? 그 정성이 놀라울 뿐이다.
드디어 호압사 건물이 보이고 절 마당 입구에 절의 유래에 관한 전설이 적혀있다. 조선 초에 호랑이 같이 생긴 호암산이 한양의 궁궐 건설을 방해하고 위협한다는 생각으로 그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이곳에 호압사를 지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9세기에 와서 이 절이 다시 중창되었다고 하는데 현대에 와서는 그 호랑이 상징을 강조하기 위해서 마당 옆에 채색한 호랑이 조형물까지 세워져 있다.
대웅전에 해당하는 약사전과 범종각 앞 절 마당에는 500 년 이상 되어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다. 이 나무가 오랜 세월 이 절의 역사를 모두 지켜보았으리라.
호압사 탐방을 마치고 숲 속에 설치된 자그마한 공연장 계단에 앉아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음료수와 간식도 먹고 잠시 쉰 후에 호암늘솔길을 찾아간다. 호암늘솔길은 장애인주차장 옆에서 시작되는 무장애데크길이다. 이 길에 들어서자마자 친구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다. 바로 이런 길을 기대했다나.
이 데크길은 원래 서울둘레길 호암산 코스의 일부로 관악산입구역에서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코스 중간에 있다. 우리는 지난 7월 초에 석수역에서 출발해서 이 길로 와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날은 날씨가 너무 더웠기 때문에 늘솔길까지 오지 못 하고 도중에서 원점으로 회귀하여 호암산 숲길공원에만 머물렀다가 석수역으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번과는 반대로 호압사에서 출발해 보기로 한 것이다.
호암늘솔길은 정말 우리들의 기대에 맞고 마음에 드는 길이다. 소나무와 잣나무 울창한 숲 속길을 돌부리와 나무뿌리에 채일 염려 없이 안심하고 수다를 즐기며 걸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늘솔길 옆으로는 넓게 잣나무 삼림욕장이 있고 평상도 마련되어 있어 날씨 좋을 때 도시락 싸가지고 와서 피크닉 하기도 좋겠다.
서울둘레길은 앞으로 석수역까지 계속되지만 호암늘솔길은 그리 길지는 않다. 호암산폭포라는 지점에 이르니 무장애길은 끝나는 것 같다. 호암산폭포는 인공폭포인데 지금은 물절약 정책에 의해 가동을 중지한다고 한다. 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아도 호암산의 바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보기에 좋다. 호암산폭포 바로 앞에는 승강기가 있는데 이것을 타고 내려가면 큰길로 연결된다.
이제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서울둘레길을 따라서 앞으로 더 걸어서 석수역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 큰길에서 버스를 타고 가까운 전철역으로 가서 식당을 찾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석수역까지 가려면 한 시간 이상을 더 걸어야 할 것 같다. 지금 시간은 벌써 한시가 되어가는데.
결국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 큰길에서 버스를 타고 가까운 서울대벤처타운역으로 가기로 한다. 그런데 이 버스가 가는 길이 호암산 자락을 돌아가는 산중턱의 높은 길이어서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숲의 풍경이 일품이다.
서울대벤처타운역? 낯선 역이름으로 경전철 신림선이 관악산역까지 개통되면서 신림천 변에 새로 생긴 역이다. 이 근처가 예전의 신림동 고시촌이었다고 한 친구가 말해준다. 요즘 고시가 없어지면서 고시촌도 이름이 현대적으로 바뀌었나 보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 예전 고시촌의 먹자골목으로 식당이 많다. 우리는 소문났다는 어느 쌈밥집으로 들어간다.
낯선 옛 동네의 낯선 식당에서 푸짐한 쌈밥을 먹다 보니 어느덧 집에 갈 시간이 되어 후식 카페는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오늘 모임에서는 J와 D가 여고 졸업한 지 59년 만에 처음 여기서 만났다면서 서로 반가워하였다.
오늘은 길에서 보낸 시간에 비해 걸음수는 그리 많지 않다. 구천보. 만보가 안 된다. 처음에 호압사입구까지 버스 타고 가느라고 시간이 좀 더 걸린 데다가 비탈이 심한 길을 힘들게 올라갔기 때문 인가 보다.
2024년 9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