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떠러지 벼랑 끝에서 놓지 않은 손
아빠한테 끌려갔다.
그리고 친구 부모님도 시골에서 소환되었다.
부모님들끼리 회의가 시작되었고 결론은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밀어주자였다.
각 집에서 3000만 원씩 합해서 6000만 원!
2평 남짓 구멍가게에서 대학교 메인상권으로 들어갔다.
노점에서는 빵빵 버거만 팔았지만 새로 오픈하는 곳에서는 생과일주스도 팔았다.
그래서 가게 이름이 "쭈~쓰 빵빵"이다.
장사는 잘 되었다. 그러므로 해피앤딩으로 끝나야 할 것 같은 20대 초반의 장사이야기는 그러나 아쉽게도 새드앤딩이다.
여러 가지 힘든 일도 많았고 어려운 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내 탓도 크다.
나는 상처투성이인 사람이었다. 돌보지 않은 나의 상처는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아팠다. 언니와의 비교에서 얻은 상처도 치유되지 않고 온몸 곳곳에 새겨진 채 그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 나는 사소한 것들에도 예민해져 있었다.
친구와 나를 두고 손님들과 지인들이 하는 작은 농담에 나는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나는 매일을 매 순간을 심판대에 올려져 삶과 죽음 앞에서 달달 떨었다.
내가 낫다고 하면 그날 나는 살았고 친구가 더 낫다는 평가에 그날 나는 죽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비결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일 테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미 나는 그 반대편으로 너무 멀리 와버렸다.
나를 사랑하는 길.. 그 길은 멀어졌고 희미해졌다.
사람들이 무심코 던진 농담에 나는 상처받았고 그 말을 혼자 가만히 곱씹으며 100번 1000번 나를 비난하고 미워했다.
나는 내 상처를 드러내고 돌보는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나는 그 누구도 내 상처를 건드릴 수 없게 내 주변에 벽을 쌓아 올렸다. 누군가 그 벽을 넘어 내게 다가오려 하면 안간힘을 써서 더 높게 더 높게 벽을 쌓았다. 그리고 더는 못 오게 내 온몸에 온 마음에 가시가 돗아나게했다.
안전하길 기대했던 그 공간 속에서
나는 피곤했고 아팠고 슬펐고 외로웠다.
그런 내 옆에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내 옆에 바짝 붙어서는 내 가시에 찔렸다. 그리고 아파서 울었다. 나는 친구를 아프게 하는 내가 싫어 울었고 나 때문에 우는 친구를 보며 미안함에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난 친구가 내 옆에 있는 게 싫어졌고 지겨워졌고 화가 났다.
그럼에도 낭떠러지 벼랑 끝에서 간신히 매달려있던 나는 친구 손을 잡고 겨우 버텼다. 친구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살았다.
우리는 가게 문을 닫고 각자 돈을 벌러 갔다.
가게가 팔릴 때까지 월세도 관리비도 내야 했다.
친구는 영어학원으로 갔다.
대학에서 영어영문과를 전공했다.
난 수학학원으로 갔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내 별명이 "영어병신 수학천재"였다. 나는 영어는 못했지만 수학은 잘했다.
나는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양아치임을 폭로해야 하기에 용기가 필요하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 이 이야기는 일단 다음 화로 미뤄봐야겠다.
나중에 로스쿨출신 변호사한테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법 관련 공부를 잘하려면 수학을 잘해야 한다고 했다. 둘이 논리랑 골격구조가 비슷하다나? 암튼 뒤늦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 똑똑하지 않은 내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단시간에 극적으로 딸 수 있었던 건가?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