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윤이 Mar 26. 2022

미래와 희망은 오로지

마법의 성/더 클래식



2015 2월의 어느 , 회사의 화장실  번째 칸에서 임신테스트기로 임신을 확인한 나는  길로 갑자기 '엄마'라는 단어에 성큼 다가서게 된다. 결혼한    만에  다른 마음의 준비가 없던 상태에서 생긴 아이는 기쁨보다는 당혹에  가까웠던  같다. 임신으로 인해 우리 부부에게 달라진 것이라고는 내가 입덧을 시작했다는  밖에 없었지만  입덧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거대한지 일상은 천천히 그러나 처참하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우선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을 30 동안 타야 하는  가장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입덧은 영어로 Morning sickness. 그만큼 아침에 강력한 증상이 나타나는데, 마침  시간에 사람들이 즐비한 지하철을 타고 30분이라니!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묵묵히 그리고 철저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서 울렁이는 속을 잠재울 비스킷이나 누룽지  숟가락을  챙겨 먹고 최대한 사람이  붐비는 칸을 노려 지하철을 타고, 타자마자 매의 눈으로 앉을  있는 자리를 탐색했지만.. 언제나 내가 앉을  있는 자리 같은  없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임산부석이 분홍색 시트가 아닌 평범한 자리였다. 자리 위에 '임산부 우선'이라고 쓰여 있는 작은 스티커가 있었지만, 요즘처럼 핫핑크의 임산부석에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비임산부가 앉아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하는 판국에 바랄  바라야 했다. 지하철에서 쓰러지거나 토할 수는 없다는 일념 하나로 임산부 배지를 아무리 열심히 가방에 달고 달랑달랑 다녀도,  바쁜 출근길 지하철에서 그런 사소한 투쟁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지옥철 안에서 극한의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스물일곱의 임산부에게 유일한 위로는 이어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였다.  당시 전현무가 MBC 굿모닝 FM 디제이였는데 안정된 진행과 아침시간에 걸맞은 에너지로 청취율도 높았고,  역시 전현무는  좋아해도 무디는 좋아하는 애청자  하나였다. 출근 시간대의 라디오다 보니 재미있는 코너가 많았고 음악도 거의 밝은 댄스곡 위주의 선곡이 이루어졌었다. 덕분에  아수라장 속에서도 간혹 피식피식 웃기도 하며 울렁거리는 속과 함께 괜히 처량하게 느껴지는  신세를 달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 어떤 날이었는지, 어떤 사연이었는지 전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뜬금없이  라디오에서 더클래식의 '마법의 ' 나왔다. 중학교 2학년 합창대회  지겹도록 부르고는  후로는  번도 찾아 듣거나 불러본  없는 노래. 평소의 무드와는 어울리지 않는 선곡이었지만 오랜만에 듣는  노래의 멜로디가 마냥 반가웠다. 그리고 그날따라 이상하게 이어폰 속으로  노래의 가사가 또렷하게 들어왔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언제나 너를 향한 몸짓엔 수많은 어려움뿐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굳은 다짐뿐이죠.

다시 너를 구하고 말 거라고.



내 마음 같았다. 언제나 좋은 노래는 내 마음처럼 들린다. 이건 지금의 나에게 진짜 좋은 노래라는 본능적인 확신이 들었다. 지금 내가 지하철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자비 없이 흔들리는 이 손잡이를 붙들고 버티고 있는 이유는 너라는 마법에 빠진 공주를 이 세상에 건강하게 내놓기 위해서라고. 이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는 너를 지켜주고 말 거라고.

유치하다며 그렇게나 이 노래를 부르기 싫어했던 열다섯은 뱃속에 생명을 품은 스물일곱이 되어 운명처럼 다시 이 노래를 만난 것이다.

그렇게 기진맥진한 채로 출근해서 좀비 같은 얼굴로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 그때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누룽지와 전복죽밖에 없었다. 나는 회사 앞 본죽에서 전복죽을 사다가 탕비실에 혼자 앉아서 죽을 떠먹었다. 아니 떠먹은 게 아니라 혀로 핥아가며 억지로 억지로 뱃속에 밀어 넣었다. 그때도 그 조용한 탕비실에 괜히 외롭게 느껴질 때면 이어폰을 꽂고 마법의 성을 들었다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 입덧의 늪을 건너 어둠의 임신 기간이 지나면 곧 우리 아가를 볼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오로지 버티는 시간. 아침엔 누룽지 몇 숟가락, 점심엔 전복죽 몇 숟가락 먹은 게 다니 저녁이 되면 너무너무 허기지고, 속이 허기지면 울렁울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냉장고 문만 열면 바로 화장실 변기와 하이파이브를 해야 하는 처지이므로 나는 저녁에도 또 누룽지나 죽을 먹는다. 그때는 먹방이 이제 막 유행하던 시기라 티브이에 잔뜩 클로즈업된 음식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그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상태로 20주를 보낸 것이다. 그렇게 26주가 되던 때, 입덧은 어느 날 갑자기 가출한 청소년처럼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이제 진정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으며 호사스러운 임신 시간을 보낼 수 있겠구나 기대로 가득 차 있던 내 앞에 잦은 배뭉침이 찾아왔다. 아직 26주면 출산이 두 달이나 넘게 남은 시점이었는데 아무리 임신이 처음이라지만 본능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나 회사 화장실 세 번째 칸에서 팬티에 묻은 핏빛을 목격하고는 그 길로 산부인과로 향했고 나는 지갑과 휴대폰이 들어있는 핸드백 하나만 달랑 맨 채 입원을 하게 된다.

그때 내가 다니던 산부인과의 이름은 미래와 희망이었다. 하지만 미래와 희망은 개뿔. 고위험 산모로 좁고 낯설고 왠지 춥게 느껴지는 병실 침대에 누워있자니 미래와 희망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내 손목에는 라보파라는 자궁수축제가 놓아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벌렁벌렁거리고 손이 덜덜 떨리는 무서운 주사였다.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고 그냥 아이만 무사하게 해달라고 빌면서 애가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워서 매일매일 울었다.

그때 나에게 실오라기 같은 미래와 희망을 놓지 않게 해 준 것도 역시나 '마법의 성'이었다.

내가 입원해있던 병실은 2인실이었는데 나는 조산기 환자이니 계속해서 그 자리에 누워있어야만 했고, 내 옆 자리는 출산을 한 산모가 삼일에 한 번 꼴로 바뀌어 갔다. 건강한 아이를 낳은 산모들은 넘치게 축하를 받았고, 나는 계속해서 옆에서 그 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왜인지 몰라도(사실 알지만) 그때마다 자꾸 눈물이 났다. 어느 날은 하필 입원을 연장해야 한다는 통보를 듣고 절망에 빠져있을 때, 옆 자리 산모의 식구들이 몰려와서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고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참고 싶었지만 눈물이 쏟아졌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울고 말았다. 그러자 하하호호 웃던 옆자리 산모의 가족들이 별안간 조용해지면서 '쉿, 너무 크게 웃지 마. 옆자리에 고위험 산모가 있어'하고 속삭이는 말이 들려왔다. 배려심 깊은 분들이었는데 참 그게 뭐라고 그렇게 서러웠을까. 서로 가지기 않아도 될 죄책감으로 점철된 분위기. 나는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 움직이는 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두 손을 모아 기도했죠. 끝없는 용기와 지혤 달라고.



그때 나는 정말 끝없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했다. 매일매일 몸이 너무 고됐고 하루 반나절만에 손바닥 뒤집듯 뒤바뀐 일상이 낯설기만 했고 혹시나 나 때문에 아이가 아프게 될까 봐 그게 가장 무서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법의 성을 들으며 스스로를 달래도 또 달랬다. '그래, 나는 마법에 빠진 공주를 구하러 가는 이 성의 왕자야. 결국엔 해피엔딩일 테니, 이 정도는 거뜬해!' 하면서. 그렇게 한 달이 넘는 지난한 입원생활 끝에 결국 아이는 37주를 하루 앞둔 36주 6일, 2kg. 이른둥이이자 저체중아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응애응애 하고 우는 찌그러진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임신 기간 내내 들었던 노래가 생각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겠지.



이제 나의 손을 잡아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우리 앞에 펼쳐질 세상이 너무나 소중해.

함께라면.




이상하게도 지금도 아이는 이 노래를 들려주면 '엄마 마음이 이상해'하면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이상하게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면서 그때 그 시절을 통째로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서로를 기다리며 서로를 믿어가며 서로를 위해서 보낸 시간이 우리만의 마법의 성을 더욱 단단하게 해 주었구나, 하는 생각에. 촘촘하게 견뎌온 시기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이 세상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여전히 동굴 속을 건너는 시기를 마주할 때면 두렵지만, 두렵지 만은 않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냥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빵을 사 먹거나 달리기를 하거나 춤을 추거나 영화를 보거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수영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노래하거나 울거나 웃거나 마법의 성을 듣거나.

우리 앞에 펼쳐질 세상은 여전히 너무나 소중하다. 너와 함께라면.

이전 01화 취미는 다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