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바꿀 수 없지만,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시간 참 빠르다. 벌써 11월이다. 할 일은 많은데, 해놓은 것은 없는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일까? 하루가 너무 짧다. 한 해도 금방이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해야 할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길까? 이렇게 시간이 없다고 하소연하면서 종종 거리며 살아가면 분명 몇 년 혹은 몇십 년 후에 이런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인생은 왜 이렇게 짧은 거냐고.
그런데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이며, 연설가였던 '세네카'는 2천여 년 전에 이미 답을 내놓았다. 인생은 충분히 길다고. 단지 우리가 짧게 살고 있을 뿐이라고.
네로 황제의 스승이자 고문이었던 세네카는 한 때 로마 제국의 최고 권력자였으며, 당대 최고의 부자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느닷없이 사형을 선고받고, 가까스로 사형은 피하지만, 코르시카로 끌려가 8년간 유배생활을 하고, 로마로 다시 돌아와 네로 황제의 스승이 되지만, 결국 네로에게 자살을 명령받고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 삶의 여정 속에서 그는 '삶과 죽음, 분노, 행복, 평상심, 섭리' 등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다.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에서는 총 7편의 글이 수록돼 있다.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행복한 삶에 대하여
은둔에 대하여, 섭리에 대하여, 마르키아에게 보내는 위로, 어머니 헬비아에게 보내는 위로 그리고 폴리비우스에게 보내는 위로까지. 2천여 년 전의 웅변이지만 현대의 우리 삶도 그대로 관통하는 가르침이다.
우리가 짧은 인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짧게 만든 것이며,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낭비한 것입니다. 왕의 막대한 재산도 나쁜 주인을 만나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무리 작은 재산도 현명한 관리인을 만나면 잘 불어나듯이, 우리의 인생도 잘 배치하여 사용한다면 더 큰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남이 자신의 땅을 침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경계를 두고 작은 다툼이라도 생기면 돌과 무기를 들고 달려갑니다. 하지만 다른 이가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허락하고, 심지어 장차 자신의 삶을 빼앗을 자들을 스스로 불러들이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재산을 나누려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삶은 수많은 이에게 나누어 줍니다. 상속받은 재산을 지키는 데는 집착하면서도, 시간은 아낌없이 허비합니다. 시간을 아끼는 것만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유일한 욕심인데도 말입니다.
당신들은 필멸자로서 모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불멸자처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이루려 합니다.
천천히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얼른 끝까지 읽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책, 그냥 오늘은 한 페이지만 아니 한 문장만 읽자고 생각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 한 문장을 읽고 천천히 곱씹어 봐야 하는 책,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세네카가 남긴 몇몇 구절들을 읽어보면 왜 천천히, 꼭꼭 씹어가며 읽어야 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맹세컨대 당신이 천 년을 산다 해도, 당신의 삶은 아주 짧은 기간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악행을 저지르며 보낸 시간은 허비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본래 빠르게 흐르지만, 계획을 세워 잘 활용하면 늘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시간이 당신에게서 빠르게 달아나는 것은, 당신이 시간을 붙잡으려 하거나 그 흐름을 늦추려 하지 않고, 마치 언제든 채울 수 있는 것처럼 무심히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법은 평생 배워야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죽음 또한 평생 배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사람이 살아온 햇수를 아는 것처럼 앞으로 살 햇수를 안다면,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두려워하며 얼마나 아끼겠습니까!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그 양이 정해져 있다면 계획적으로 쓰기 쉽지만, 언제 바닥날지 모르는 것은 더욱 신중히 아껴야 합니다.
길잡이를 따르지 않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갖가지 소리와 외침을 좇아 이리저리 헤맨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밤낮으로 노력해도 길을 찾는 동안 짧은 인생만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가야 할 곳과 그곳으로 가는 길을 정해야 하며, 그곳을 이미 경험하고 살펴본 이의 도움도 받아야 합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려 농작물이 자라는 경작지에 어떤 꽃들이 사이사이 피어나 눈을 즐겁게 한다 해도, 농부가 그 꽃들을 위해 그토록 힘들게 일한 것은 아닙니다. 씨를 뿌린 농부의 뜻은 전혀 달랐는데도 그런 결과가 생긴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쾌락은 미덕에 대한 보상이나 동기가 아니라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미덕이 즐거움을 약속하기에 우리가 미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덕을 선택하면 미덕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영혼을 단련할 수 있는 기회는, 역설적이게도 가난보다는 부유함 속에서 더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가난할 때는 가난에 굴하지 않는 단 하나의 미덕만을 기를 수 있지만, 부유할 때는 절제와 관대함, 검소함, 질서, 아량을 기를 수 있는 넓은 터전을 얻게 됩니다.
불은 시대를 막론하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든 도시의 시민을 태우며, 칼은 모든 육신에 같은 상처를 냅니다. 왜일까요? 불과 칼의 힘은 자연이 부여한 것이어서 사람에 따라 달리 작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난과 비통함, 야심 같은 것은 각자가 만들어온 습관에 따라 서로 다르게 느낍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을 선입견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습관이 몸에 배면, 그 사람은 결국 아주 작은 시련조차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바람에 나무가 뿌리째 뽑히거나, 거센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들이닥쳐 가지가 부러질 때, 현명한 농부는 남은 가지들을 소중히 돌보고 뽑힌 자리에는 즉시 씨앗을 뿌리거나 묘목을 심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순식간에 자라나, 잃어버린 것보다 더 무성한 숲을 이루게 됩니다. 잃는 것도 한순간이지만, 다시 자라나는 것 또한 한순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