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6
햄버거 관련 에피소드를 써놨지만 글을 올리는 게 쉽지 않다. 평소 나라 상황을 깊게 주시하거나 하는 편은 아닌데 그냥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몰입 중이다. 다른 속성의 얘기를 보이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는다. 마치 나라랑 한 몸인 것 마냥. 다들 자기 할 일 하면서 몸 방향은 맞추고 있는 것 같다. 나만 심각한 게 아니라 다행이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이들 만큼은.
글 쓸 때만 좀 '의식 있는 생각'이라는 걸 해보는 시간인데 이게 온통 계엄 이후 나라 상황으로 가득 차 있다. 의식을 담아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다. 이런 일이 벌어진 근본적인 이유, 앞으로 어떤 상황으로 가게 될 지에 대한 불안한 예측들.
설마 진짜 망해버리는 건 아니겠지.
한국이 아직 그 정도는 아닐 것이라 생각하지만.
2024 12/8
왜 저럴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당연한 거다.
내 주변엔 '밥그릇'만 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밥그릇만 어떻게든 지켜내거나 키우는 것이 삶의 '당위'다.
그것이 마치 이 세계를 떠받드는 때 묻지 않은 본질인 양.
그것에 관한 많은 이념 체계들이 정당하게 깔려있는 양.
논리를 확보했으니 무슨 짓을 하든 자연스럽게 합리가 된다는 듯.
어쩔 땐 '무적자'처럼 낯이 두꺼운 그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했다.
심지어 그렇게 사는 법을 기능으로써 설명하는 시대.
나는 왜 저러지 못할까.
나는 왜 저러지 못해서 늘 굶주리고 예민해야 하나.
그러다 다툼이라도 일면,
"나와 같은 상황에서 너는 안 이럴 것 같아?"
"이렇게 하지 않으니 그렇게 사는 거야 넌. 위선자 새끼야."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바꿔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너와 다른 사람이군.'
우연일 것이다. 그리고 체질이 다를 것이다.
보고 듣고 자란 환경이 다른 건 우연히 일어난 일이고
보고 듣고 자란 환경에 대한 해석이 다른 건 체질 때문이다.
우연과 체질.
너와 내가 공유하는 것은 '인간의 기능과 외형' 뿐이지 않을까.
어쩌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을 사용하는 완벽하게 다른 개체.
다만,
그 사실을 허락하는 범위는 내 주변으로만 제한한다.
단지 너 하나, 너 둘이라서 나 하나, 나 둘 쯤으로 공존이 가능하니까.
'나'라는 개체 단위가 공동체 단위로,
동네 단위로, 지역 단위로, 국가 단위로 올라가면서부터는 그러나.
이제 다른 얘기를 해야 한다.
나 같은 애 몇 쯤으로는 '너'들을 감당하기 힘들다.
'나'들은 너희를 압도할 만큼 많아야 하고
너희가 너희 밥그릇을 채우기 위해 무슨 짓을 저질러도 큰 결속이 풀리지 않을 만큼 강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너의 숟가락이 공존을 파먹을 수밖에 없다는 걸 미리 알고 우리는 공공의 주걱을 만들어 대비해야 한다.
공공. 공적 욕망. 이기적 이타성.
그러니까,
너와 내가 공존하려면
'그 자리'에 네가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냥 내 옆 자리로 만족해라.
너의 욕망은 공적인 것이 아니고 그저 이기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내 옆에서는 얼마든지 무법하게 숟가락질해도 괜찮다.
나야 뭐.
참고 참아내다가 가끔 풀 스윙으로 네 귓불 한 대씩 올려치면 그만인 것.
그 정도 힘쯤은 지금 먹는 밥으로도 충분히 나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