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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치미 Dec 16. 2024

익숙하지 않았던 것들


 (아마도 2020년이 오기 전 언젠가)



 "내일 애들 만나기 싫다."


 텀블러를 감싸며 지원이 말했다.


 식사를 마친 이른 저녁이었다. 붐비는 사람들을 피해 붐비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교대 근처 왕복 8차로쯤 되는 도로변 카페에서, 통유리 너머로 시선을 나란히 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완전히 저물겠지. 느린 걸음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의 비좁은 틈이 답답해 보였다. 잠시 옅은 남색으로 바뀐 하늘을 향해 고개를 올렸고, 그 사이 지원의 머리가 어깨를 눌렀다. 한 동안 그렇게 머물렀다.


 지원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친하게 지내던 녹음실장님의 소개가 있었다. 만든 곡들의 가이드 보컬을 찾던 중, 마침 며칠 전 녹음하고 간 괜찮은 보컬이 있다며 연락이 왔다. 연락처를 받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서로 날짜를 정리해 신림동 녹음실에 일정을 잡았고, 우린 몇 번의 녹음을 같이 하게 됐다.


 녹음이 끝나면 가는 방향이 같아 사적인 얘기를 나눌 틈이 자주 생겼는데, 그 사이 당연하다는 듯 가까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밤낮없이 손을 잡는 관계로 변할 거라는 건, 서로에게 어렵지 않은 예상이었을 것이다.


 고개를 다시 천천히 돌려 지원을 봤다. 옆에서 보는 얼굴의 능선이 꽤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고운 능선 아래 어떤 인내가 굽이치는지 물론 알 길은 없었다.


 만난 지 반년쯤 지났을 때 지원은 본격적으로 임고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졸업을 코 앞에 두고 동기들보다 준비가 늦었다며 자책을 늘어놓는 상황이 조금씩 늘어났다.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도 없어 좀 더 복잡한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에 대한 내색은 별로 하지 않았다.


 통유리 밖 이른 저녁 하늘은 그랬던 시기에 그녀가 바라보던 것이었다. 내가 사준 녹색 텀블러에 페퍼민트 차를 잔뜩 담아 저 밖을 내다보며 홀짝이곤 했다. 밥 먹고 바로 그렇게 마시면 소화가 안될 텐데 하는 핀잔을 여러 번 주었으나, 늘 그 한 통을 다 비우고 나서야 우린 일어날 수 있었다.


 "오빠."


 "어."


 "나 좀 힘들다."


 "음? 응."


 기댔던 머리를 떼고 묻는 게 아쉬워 신음 같은 대답이 나왔다.


 "여기저기 노래 부르고 다닐 때가 진짜 좋았지. 지금 애들 대하는 거 익숙해지지도 않고, 선생님들 눈치도 봐야 하고."


 해는 아까부터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차를 다 마셨는지 지원의 홀짝임도 멈췄다. 아니, 진즉 멈췄던 것 같다. 이상했다. 보통은 손 잡고 집에 가는 시간이지 않나? 못 본 사이 뭐가 좀 변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는 아주 길어야 사나흘이었는데 이번엔 보름을 못 봤으니까.  


 "아니, 너 초임이잖아. 당연하지 뭐. 당연한 거지. 초임이라 고학년까지 맡았으니까... 아마 여러 가지 너도 모르게 신경 쓰이는 게 많을 것 같은데."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리고 당연하지 않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좀. 아무튼 그래."


 말문이 막혔다. 다른 때완 다르게 단호한 말투도 신경 쓰였다. 지원의 생활에 대해 앞으로 알 일이나 있을까 싶은 불쾌한 깨달음이 갑자기 눈앞을 가렸다. 뭐라 해야 하나, 막연히 침묵만 보내던 차에 천천히 앞을 지나가는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서로 깎지 낀 채 팔 길이를 자유자재로 하며 장난치듯 걷는 그들에게서 흐릿한 기시감을 느꼈다. 문득, 부러웠다.


 '내가 왜 부럽지? 내가 지금 부러워해야 하는 상황인가?'


 보름 만에 만났음에도 우린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피곤하지 않아? 수업 끝나고 왔잖아." 마음에 없는 소릴 하며 지원의 집까지 배웅했다. 처음부터 자신의 집에 올 생각이었던 것처럼 구는 그녀 모습에서 어떤 익숙함 같은 걸 느꼈는데, 그게 내겐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돌아서 가는 길 역시 낯설었다. 언젠가는 별빛으로 찬란했을 내곡동의 어느 한적한 마을이, 원래 이렇게 어두운 곳이었는지 전엔 미처 몰랐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메일함에서 받은 메일들을 확인했다. 얼마 전 퍼블리싱 회사에 보낸 곡들에 대한 피드백이 와있는지 궁금해 스크롤을 내렸다. 답장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그렇지.'


 메일함을 닫고 워드를 열었다. 당장 생각나는 것들에 대해 무작정 두드렸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


 -수업 끝나는 시간 맞춰 기다리기


 -빼먹은 거 챙겨가기


 -가끔 도시락 싸가기


 -비 오는 날 우산 챙겨 카페 대기


 -주말 내내 같이 보내기


 -그러나 사실 그런 것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아가는 일.


 -내가 더 안정된 생활 하기


 -김태희 얼굴


 -김태희 결혼


 -인도에서 담배 뿜는 새끼


 -길에 가래침 뱉는 새끼


 -최순실


 -세월호


 -인스타


 -너와 헤어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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