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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Jul 14. 2024

다름이라는 다양성을 마주하는 교실

다름이 주는 생각의 기회

중학생인 둘째는 자폐의 경계에 있는 듯한 남자아이, 준서(가명)와 같은 반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쭉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같은 반이 된 적이 많은 친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진행한 부모와의 수업을 참여했을 당시 내가 맡은 남자아이 그룹에 준서도 있었다. 그날 겨우 몇 시간 5명의 남자아이와 함께 수업한 후, 집에 와서 완전히 뻗었던 기억이 있다. 딸 둘만 키우다 꾸러기 남자아이들 5명을 맡았었고, 다시는 부모수업에 지원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 날이기도 했다.  

그때 준서를 보면서 아이들과 좀 많이 다른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자폐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준서가 해외에서 살다 와서 적응에 어려움이 있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중학생이 된 준서는 둘째와 같은 반이다. 지금도 가끔 둘째는 준서 이야기를 한다. 누구도 그 친구를 자폐라고 규정하지는 않지만, 아이도 이미 어느 정도 준서는 친구들과 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준서의 모습을 초등학교 때부터 보아왔다.  


둘째는 언제나 준서를 ‘우리 준서’라고 부른다.

“오늘 우리 준서가 떠들어서…”, “오늘 우리 준서 넘어져서…”  

아이에게 물었다. “왜 준서 이야기 할 때 항상 ‘우리 준서’라고 하는 거야?”

아이의 대답은 “우리 준서 귀여워, 우리 준서 정말 열심히 해, 춤도 열심히 추고…”  

"엄마가 일일 선생님 할 때 준서는 말썽쟁이였는데 선생님 말 잘 듣나 봐.”

“아니 지금도 엄청 떠들고, 수업시간에 갑자기 소리 지르고, 선생님이 힘들어해..”

그럼에도 둘째의 마음속에 준서는 언제나 지지하는 오랜 친구였다.


하루는 둘째가 밥을 먹으며 투덜댄다.

“선생님이 00 활동에서 우리 준서가 감독관 하고 싶어 했는데 안된다고 했어! 왜 그러나 몰라. 우리들이 항의했는데도 선생님이 끝까지 안된다고 하더라고... 우리 준서 잘할 수 있는데…”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모두 돌봐야 한다. 그리고 겨우 1년 준서와 함께 할 것이다. 준서는 학생 들 중에 특별한 케어가 필요하거나, 준서로 인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 존재일 수 있다. 어떤 역할을 맡기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같은 동네 살면서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를 함께 간 친구들은 그런 준서를 어릴 때부터 보아 왔고 함께 자랐다. 그러면서 준서의 다른 점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준서에게 안된다고 하는 순간 그 친구들은 선생님께 준서가 그 역할을 잘할 수 있으니 시켜주라고 큰소리로 항의 하 듯 제안했다고 한다.

준서만큼 실망한 건 아니겠지만 아이는 여전히 ‘우리 준서 잘할 수 있는데..’라는 말을 하며 아쉬워한다.


그 역할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 역할을 준서에게 맡겼으면 어땠을까?  

선생님의 입장이라면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할 것이고 그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할 확률이 클 것 같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을 아이들과는 공유하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반대로 생각을 해봤다. 준서가 그 역할을 하고, 친구들이 그 역학을 할 수 있도록 지지한다. 그렇다면 준서가 그 역할을 할 때, 분명 준서를 지지한 친구들은 준서에게 협조를 잘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준서를 놀리거나, 싫어하는 친구도 있다. 그런 다양한 환경 속에서 준서가 어떤 책임의 의무를 해야 한다면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을 마주할 것이다. 그 문제 해결을 위해 준서, 선생님, 우리 준서를 챙기는 아이들은 새로운 도전을 마주할 것이다.  


내가 선생님이라면 그런 모험을 했을까?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없지만 ‘우리 준서’의 열정이 지지받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하는 내 아이의 마음속에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세상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아이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고 해결하려고 시도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마음의 의문을 가졌지만, 누구도 설명해 주거나 답을 주거나, 논의하는 상황도 아니다.

 

아이가 ‘왜!’라고 물을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며 아이는 투덜대는 모습으로 스스로 의문을 잠재워 간다.  

나는 이런 고민을 마주한 적이 없다. 내가 다름을 마주하는 다양성의 경험 부족일까,  어떻게 아이와 이야기를 이어 나갈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생각해 본 적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둘째의 해결되지 않는 의문, 마음속의 ‘why’를 통해,  

주름진 아이, 나는 오늘도 그에게 배운다.  


#다양성 #포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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