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지 10
주제와 파악을 띄어 쓰면 주제를 파악한다거나 파악하자는 말일뿐인데 이걸 붙여 쓰면 단어에서 어쩐지 쓴 맛이 난다.
퇴사를 한지 이제 삼 개월이 되었다. 첫 달은 흥미진진했고 두 달째엔 조금 초조하지만 여전히 희망에 차 있었던가 하면 세 달째에 이르러서야 나는 드디어 주제파악을 하게 됐다. 프리랜서에게 돈벌이와 우아함은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팔을 걷어붙이고 나를 알려도 모자랄 판에 메일 몇 통 넣어두고 아령이나 들고 달리기나 하고 있었으니 누가 나를 알까. 내가 나를 알리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직장에서는 굳이 나를 어필하지 않아도 일이 계속 있었고(이것은 직원을 연봉 얼마짜리 숫자로 보는 오너에겐 당연한 일) 경력이 있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으니 나가도 어찌 저찌 살 길은 있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 회사만 다녀 바깥세상은 어떠한지 전혀 모르는, (경기 침체가 오던가 말던가 월급은 꼬박꼬박 나왔으므로) 회사에서 받는 견적이 개인에게 통용될 거라는 순진함이 합쳐진 결과다.
어제 프리랜서 친구들에게 일을 어디서 구하냐고 물어봤는데 정말 실력 있는 친구들임에도 불구하고 자리 잡는 데엔 꽤 시간이 걸렸고 그 초석을 다지는 데는 다들 내가 기피하던 프리랜서 사이트가 있었다. 오늘도 H 씨가 도대체 왜 홍보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느냐고, 자존심은 다른 데서 찾고 효율을 챙기라는 따끔한 조언을 하며 사이트들을 뿌려주는 게 아닌가.
맞다. 코를 아주 납작 주저앉히고 모든 사이트에 다 등록을 해야겠다. 요 근래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회사를 나와도 고용되어야 먹고 살 수 있는 건 똑같구나. 백두산은 언제 터지나 같은 생각만 했는데 어제 ‘’에에올’ 조부 투파키의 코비드 코스튬을 보며 불현듯 소용이 있음을 찾았다. 너무 소용이 있지, 왜냐면 너무 웃기니까.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허무함 운운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웃긴 옷을 입고 베이글이나 까맣게 태우고 있는 일인 것 같다. 아무도 먹지도 못하게 말이다. 집에 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