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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김정 Sep 01. 2024

행운의 추첨이 아내를 데리고 왔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인류학적 관점을 0.1% 빌려온다면, 난 대체 어떤 인류인가. 

추첨에 운이 없는 사피엔스이다.

지독히도 운빨이 없다는 얘기이다.     


초등시절, 학교 앞 사행성 뽑기는(지금으로 치면 가챠다) 늘 꽝이었다.

가위바위보도, 묵찌빠도, 홀짝도 진지하게 임하지만, 하위 20% 이하다.

소풍 가서 보물 찾기 같은 행운도 내 눈엔 당최 보이지 않았다.

“이김정 발 밑에서 찾았다. 히히히.”

내가 멀쩡히 보는 앞에서 반친구가 쏜살같이 채간 적도 있다.     


오후의 나른한 사무실, 아이스아메리카노 리얼서바이벌 사다리를 타면 매번 뒤에서 첫 번째나 두 번째다.

“선배님. 오늘도 잘 마시겠습니다.”

부들부들.     

회사에서 야유회나 체육대회 말미에 재미 차원에서 갖는 행운의 번호 추첨도 역시나 꽝이였다.

동네 삼겹살집 개업식 경품 이벤트도 인연이 멀다. 로또는 말해 뭣하랴.

전생의 까르마가 무슨 고장이 난 것인지, 원인은 뭔지 모르겠다.   

  



그중 한 체육대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단풍이 완연한 가을이었다.

잠시 그룹 본사 기획실 같은, 파워가 무척 센 곳에 몸 담았을 때로 기억한다.

정약용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가, 역시 사람은 한양으로 가야한다더니, 같은 체육대회 행운의 추첨도 본사 기획실에서 하는 건 스케일이 전혀 달랐다.

경품의 면면은 고퀄리티였고(비쌌다), 참가자 모두 100% 경품을 가져갈 수 있는 구조였다.

지점 같은 데에서 갓 발령 온 나는 시골 촌사람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섣부른 기대는 애초에 갖지 않았다. 

“두루마리 휴지 정도 가져가겠지.” 하고.

물론 두루마리 휴지에 대해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행운의 추첨의 전반부 진행이 완료되었다.

헌데 내가 갖고 있는 번호가 아직 호명되지 않았다.

추첨 행사의 후반으로 갈수록 상위 등수를 뽑는 것이 통상 관례이다.

그런데 내 번호가 불리지 않은 것은 정령 무엇을 뜻하겠는가.

간밤 꿈에 돼지가 응가를 하더니, 그래서 그랬나.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종반부를 향해 가자, 경품의 퀄리티와 가격이 훠얼씬 레벨업 됐다.

경품으로 독일제 냄비 후라이팬도 나오고, 12P 디너 식기 세트에, 미남배우 광고 에스프레소 머신도 나왔고, 국내 굴지의 압력 밥솥도 나왔다. 1등은 아파트 한 채라도 나올 분위기다.

입맛을 쩝쩝 다셨고,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번호가 불릴 때마다 여기저기 “우와! 우와!” 탄성이 쏟아졌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분위기가 들썩들썩한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호명되지 않았다.

‘어떡하지, 이거. 5등만 받아도 좋은데’ 하고. “음하하하.” 속으로만 탐욕스럽게 웃었다.     

근데 어느새 2등 증정이 쏜살같이 끝났다. 

1등만 남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아직 안불렸다. 내 번호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필시 참가자 백퍼 가져가는 거라 했겠다.

1등은 바라지도 않았는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호흡이 가팔라졌다. 산소가 희박해지는 기분이다. 아, 어지럼증도 조금 있는 것 같다.

경품 받다가 들것에 실려가겠다.      


문학적으로 말하면,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 같은 샤르트르의 즉자적 실존주의적 예감으로 꽉 찼다.    


요컨대 신났다.     


진행자 억양이 최고조에 달했다.

“드디어 1등! 두구두구두구.”

사람들 사이에서 관전평이 슬슬 튀어나왔다. 

“누군 좋겠네.” 

“뭔 복이야.” 

“이거 사기 아니야.” 하는.     


표정관리를 할 수 없다. 

이 자리에 오려고 보물 찾기도 실패하고, 사행성 뽑기도, 가위바위보도, 묵찌빠도, 홀짝도, 사다리도 실패의 연속이었나 하며 인생의 제행무상을 느낀다.

증정 소감도 미리 생각해둔다.

“이 기쁨을 저희 상무님 이하...”     


“근데요.”

사회자가 음흉한 미소를 쓰윽 짓는다.

어?      


“마지막에 이러면 재미없죠.”

뭐시라?


“그래서 실은 1등과 꼴등, 둘을 남겨놓았습죠.” 

허걱!

“스릴있고 반전도 주고 좋죠. 쉽고 뻔하면 인생이 아니죠. 여러분!”     


그날 나는 두루마리 휴지 12롤 한팩을 받았다.

축하 세례를 받던 1등 수상자의 영광의 그림자에 가려져서.     




물론 맥이 풀리고, 실망도 하고, 낙담도 했다.

아니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 일을 기점으로 생각을 바꿨다. 코페쿠니스적 전환을 했다.     


나는 추첨 방식에 재능도 없고, 소질도 없고, 인연도 없는 게 틀림없다 라고. 

삐진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훌쩍, 훌쩍.”     


노력해도 안되는 것은 안되는 거고, 죽을 때까지 이건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라고.

이런 거 말고 다른 걸 인생에서 찾으면 된다 라고 생각했다.

난 실은 실내화 닦기, 냉장고 정리, 수납칸 도열에 살짝 재능을 담그고 있다.

이걸로 마누라에게 만번도 넘게 칭찬받아온 인생이다. 

“이것참, 우렁 신랑일세.”     


그렇게 신은 사람에게 모든 걸 주지는 않는다.

누군가에는 경품 추첨 운을, 누군가에게는 정리정돈 재능을.

물론 100%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뒤로 가위바위보라든지, 행운의 추첨이라든지, 아이스아메리카노 리얼서바이벌 사다리라든지, 그러한 것을 대할 때는 무심히 마음을 비우고, 인생 제행무상으로 참여한다.

그러자 서서히 변화가 생겼다.

한결 마음도 편해지고,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1등은 1등에게, 청소와 정리는 내가.  

   

한때의 폭풍우와 고요함이 지나가고 시간이 좀더 흐른다. 

그때도 체육대회였다. 

백명에 가까운 인원이 참가자에 가을 운동회 분위기였다.

오재미도 던지고, 기마전도 하고, 장애물 경주, 2인 삼각도 하고.

마지막에 행운의 번호 추첨을 했다.

그런데 소수가 경품을 받는다 였다.

지점 행사라 경비가 없어서다. 대신 없는 경비를 몰아주기로 했다.      


1등 5성급호텔 숙박권.

2등 5성급호텔 뷔페권.     

경품에 박력이 좀 있었다.     


마지막에 1등과 2등이 함께 호명되었다.

1등은 나도 아는 여자분이 뽑혔다.

매우 부끄러워하셨다.

박수.

“짝짝짝.”


그리고 2등으로 손 안의 번호가 호명되었다.

내가 2등으로 뽑혔다는 얘기다.

뭐라 감흥을 느낄 사이도 없이 무대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상하고도 기묘한 소용돌이가 내 마음 속에서 휘몰아쳤다.

1등의 그녀가 내 눈 속으로, 내 마음의 성문을 삐거걱 열고 성큼 들어왔던 것이다.

“여기, 누구 없나요?” 하고.

방망이질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쿵쾅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두들겨팼다.


실은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고, 흘깃흘깃 먼 발치에서 바라보았던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가 1등이고, 내가 2등이다.

이걸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하는 걸까. 기한을 정한다면 만년이라 할 그 사랑인가.


“이봐! 뷔페권 받으라고. 당신이 2등이라고!”

진행자의 어떤 목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만 보일 뿐. 


2등이 됐건, 꼴등이 됐건, 경품이 무엇이 됐건 간에, 마음에 둔 여자를 앞에 두고 있는 노총각에겐 그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었다.     


그뒤로 접근을 하고, 말을 붙이고, 수상자 기념을 빌미로 데이트를, 어쩌구저쩌구 로맨틱한 시간이 흘러, 그렇게 해서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하고, 이때를 생각하면 사뭇 신기함이 든다.     

“지금껏 나를 철저히 외면했던 행운의 추첨이 왜 그 순간은 마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나타나 지금의 아내를 데리고 온 것일까.”     


물론 행운의 추첨이 아니더라도 나는 다른 기회를 통해 아내에게 말을 붙여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어쨌든 행운의 추첨이 아내와 나를 이어준 큐피트의 화살이 되어준 셈이다.

이미 마음을 비우고, 될대로 되라, 난 재능도, 소질도 없다 하며 무심히 참여한 행운의 추첨이 그제서야 먼지 쌓인 운빨의 컨트롤 판넬에 빛을 “지이이잉” 들어오게 하고, 내게 행운을 가져다 준 것이다.     

이렇게 된 원리나 이유나 알고리즘에 대해선 모르겠다.

다만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감히 추측을 해본다.     


인생의 운이란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제대로 오지 않는다 이다.

대신 어깨에 힘을 빼고, 무심히 바라보고, 저건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저런 걸 가지기엔 재능도 없고, 소질도 없고, 이곳은 내 자리가 아니다 라고 하다보면, 강태공처럼 아무 상관없이 살게 되고.

그리고 잊고 있던 순간에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형태로 어느날 쓰윽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운, 운빨이란 게 아닐까 싶다.     


“여보! 냉장고 안이 정말 깨끗해졌어!”

“식은죽 먹기지.”

“아이, 당신 최고!”

이로써 10,001번째 칭찬을 방금 받았다.     


“다음은 창고 정리 부탁해!”

“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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