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 나라슈퍼 살인 사건
한국 현대사의 아픈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에서 검찰은 자주 주인공이었고, 무게감 있는 조연이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은 나의 역량을 넘어선다. 다만 검찰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수집하면서,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의 몰랐던 이야기들, 몰랐는데 심지어 정말 깜짝 놀랄만한 스토리들이 참 많았다. 나와 같은 보통사람의 관점에서 한 피의자의 이야기에 집중할 때 때론 분노했고, 때론 한숨을 쉬기도 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피의자 진구씨(가명)
진구씨, 그는 지적장애인이다. 긴 말을 하려면 힘들다. 질문이 길어져도 힘들다. 누군가와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한다. 대신 잘 웃는다. 보증금 25만원, 월세 20만원인 원룸에 살고 있다. 현재 가족은 없다. 일곱 살 때 엄마가 죽었다. 아빠는 술을 좋아했다. 늘 가난했고, 지적장애가 있던 진구씨 아빠는 엄마를 자주 때렸다. 물론 진구씨도 많이 맞았다. 중학교 2학년까지만 학교를 다녔다.
“급우들과 어울리기를 꺼려하고 정신연령이 낮은 편임.”
진구씨 생활기록부에는 이런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학교는 다녔지만 친구는 많지 않았고, 한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14살 어느 날, 배가 고팠다. 동네 친구들과 구멍가게에서 돈을 훔쳤다. 그 일로 처음 경찰서에 갔다.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8살 어느 날, 아빠와 둘이 살던 월세 10만 원 짜리 진구씨 집에 형사들이 나타났다. 수갑이 채워졌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 할머니 네가 죽였지?”
진구 씨는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뺨을 맞았다. 아니라고 말했다.
“이 씨발놈이 거짓말 하네.”
형사 아저씨가 발로 진구 씨의 가슴을 찼다. 종이를 가져와 자술서를 쓰라고 했다. 진구 씨는 뭘 써야하는지 몰랐다. 한글을 쓸 줄도 몰랐다. 손이 떨렸다. 형사 아저씨가 뒤통수를 치고, 가슴을 치고, 너무 많이 맞다보니 눈물이 나고 무서웠다.
“너 한글 못써?”
한참 뒤 진구 씨가 한글을 못 쓴다는 걸 알아챈 형사가 흰 종이에 뭔가를 적어 왔다.
“그대로 그려”
정성을 다해 그렸다. 맞을까 봐 신중하게 자세히 그렸다.
“제가 친구들과 나라슈퍼에서 물건을 훔치다 할머니를 죽였습니다.”
검찰과 법원에서 진구씨가 그려 낸 자술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적장애인이 쓴 자술서, 한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쓴 자술서치고는 너무도 구체적이었고 논리적이었는데 누구도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구체성과 논리성 때문에 요긴한 증거로 채택됐다.
“참 잘 썼어요.”
법원은 진구씨에게 징역 단기 3년 장기 4년을 선고했다.
피의자 형태씨
형태씨, 아버지는 목수였다. 술을 좋아했고, 취하면 엄마를 때렸다.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동생 둘을 데리고 집밖으로 도망치곤 했다. 붉은 노을도, 초승달도, 별빛도 형태 씨에게는 아름답지 않았다. 자주 배고팠다. 주머니엔 돈이 없었다. 그래도 여름에는 괜찮았다. 가끔 수박을 서리해 먹을 수 있었다. 어느 여름 날, 수박을 실으러 온 트럭에서 돈을 훔쳤다. 이 일로 처음으로 소년원에 다녀왔다.
동네에서도 소년원에서도 형태씨는 달리기를 좋아하고 잘했다. 어릴 적 아버지를 피해 도망치던 시간이 만들어낸 특기였다. 한번 달리면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저녁 형사들이 형태씨 집을 찾아왔다. 덜컥 겁이 났다.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형태씨를 뒤쫓던 형사들이 논두렁에 빠졌다. 형태씨가 경찰에 잡힌 것은 그날 새벽, 한 대학교의 화장실에서였다.
형사들의 주먹질과 몽둥이질이 시작됐다. 퍽퍽 사이에 수많은 욕지거리가 들렸다. 형태 씨는 아팠고 혼란스러웠다. 잠깐 정신을 차려보니 동네 친구 진구와 대철이 옆에 앉아 있었다. 슬쩍 친구에게 물었다.
“야 네가 죽였냐?”
“아니”
“그럼 너냐?”
“아니”
“근데 우릴 왜 이러는 거야?”
“몰라”
형사들은 형태씨에게 “니가 대장이야”라고 말했다. 형태 씨가 계획을 세우고, 지적장애가 있는 두 친구를 지휘해 벌인 살인 사건이라고 했다. 형사 아저씨들이 뭘 쓰라고 했고, 형태 씨는 그대로 받아 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팠고 혼란스러웠고 무서웠다.
“1미터 조금 넘는 밧줄을 주워 할머니 몸을 조금씩 감았습니다..... 진구와 나는 반으로 갈라 돈을 나누어 가졌음을 진술합니다.”
이게 자술서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종이에 쓰라는 걸 쓴 뒤 형사들의 질문이 시작됐다.
“현재 왜 조사를 받는지 알고 있나요?”
솔직히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야 이 새끼야 자술서에 이미 썼잖아!!”
형태 씨가 대답을 잘 못하자 형사들은 지어내기 시작했다. 지어낸 자술서 끝에는 이런 문답이 있었다.
“피의자는 본직(경찰)으로부터 조사받을 시 가혹행위 등을 당하며 조사를 받지 않았나요?”
“폭언이나 가혹행위 등을 전혀 받지 않고 조사를 받았습니다. 참 좋은 세상인 것 같군요.”
참 좋은 세상....
그 좋은 세상에서 형태씨는 형사들에게 딱 한 번 칭찬을 받았다. 구속영장실질심사라는 걸 한다고 판사를 만나러 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너! 판사 앞에서 범행 부인하면 다시 우리한테 와 조사받는 거야. 판사님한테 무조건 너희가 했다고 하고 잘못했다고 빌어, 알았어?”
형사들에게 또 맞는 것 죽기보다 싫었다.
“제가, 저희가 할머니를 죽였습니다.”.
형사들이 형태 씨 등을 두드리며 잘 했다고 칭찬해줬다.
그렇게 형태 씨는 난생처음 우두머리가 되어 감옥에 갔다. 우두머리는 당연히 쫄따구들보다 좀 더 감옥에 있어야 하는 거였다. 5년 6개월을 교도소에 있었다.
피의자 대철씨
대철씨 어머니는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다. 대철 씨가 여섯 살 때 남편이 몰던 경운기에서 떨어졌고, 바퀴가 허리를 밟고 지나갔다. 대철씨 아버지도 장애인이다. 교통사고를 당해 척추 장애 5급 판정을 받았다. 대철씨 가족은 여동생까지 네 식구. 이들은 보증금 1백만원, 월세 2만원의 단칸방에 살았다. 생활보호대상자급으로 지정돼 월 34만원을 국가로부터 받았다. 물론 그걸로는 생활이 불가능했다. 대철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머리는 남들보다 많이 떨어졌지만 힘은 남들보다 세다고 자부했다.
어느 날 공사판 일을 마치고 집에 쓰러져 자는데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라 슈퍼 할머니, 왜 죽였어?”
“그게 뭐예요?”
대철씨는 경찰서로 끌려갔다. 너무 많이 맞았다. 발바닥, 뺨, 뒤통수. 처음엔 저항했다. 죄가 없다고 항변했다. 억울하다고 울며 애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봉은 너무 아팠다.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대철씨에게는 알리바이라는 것도 있었다. 할머니가 살해당한 날, 난 전주에서 노동일을 마치고 전주 누나네 집에서 잤다. 그런 알리바이는 아무런 도움이 안됐다.
경찰서에서 검찰로 이송됐다. 전주지검 검사가 물었다.
“나라슈퍼를 알고 있나요?”
“경찰에 잡혀서야 알았어요.”
“돈을 빼앗은 사실이 있나요?”
“없습니다.”
“피의자는 1999년 2월 6일 새벽에 진구, 형태씨와 나라슈퍼에서 돈을 빼앗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저는 매형을 따라 전주에서 일을 했고, 그 다음 날에는 무주에서 일했습니다.”
“전주에서 무슨 일을 했나요?”
“삼각형 건물도 짓고, 창고도 짓고...”
“경찰에서 왜 돈을 빼앗았다고 했나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갑자기 충격을 받아서 말이 잘못 나왔나 봅니다.”
“유리한 증거나 할 말이 있나요?”
“저는 부모님을 돌봐야 하고, 돈 벌어 집도 사야 하고, 제 동생 학교도 다니게 해야 합니다.”
집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대철씨가 횡설수설하며 계속 무죄를 주장하자 검사는 화를 내며 말했다.
“너 자꾸 이러면 판사한테 무기징역이나 사형 내려 달라고 한다!”
대철씨는 겁이 났다. 입을 다물었다.
그날 검사는 신문조서에 이렇게 썼다.
“피의자의 태도가 어디가 모자란 듯.”
교도소에서 4년여를 보낸 후 세상에 나와 일을 시작했고 결혼도 했다. 대철씨의 꿈은 좀 더 힘을 키우는 거다. 힘이 없어서 당한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느새 두 딸의 아버지가 되었고, 보증금 50만원, 월세 20만원의 집에 산다. 애기가 아파 병원에 다녀왔다. 돈이 없어 외상을 했다. 대철 씨는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여전히 힘이 없을 거다. 그래서 이 나라는 자기 말은 믿지 않는다고 대철씨는 생각한다. 힘을 키워야 할텐데... (2부에 계속~~)
피해자 최영자(가명)
“움직이면 죽인다”
그놈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캄캄한 새벽이었다. 한 놈이 아니었다.
“돈 어디에 있어?”
“장롱...”
오직 한 생각만 들었다. 다섯 살 아들을 보호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강도들이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옷가지가 쓰러지고, 서랍들이 열리는 소리 사이에서 짧은 외침이 들렸다.
“누구야!”
고모가 깬 것 같았다. 소리는 짧았고 얼마 후 적막이 집안을 감쌌다. 방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고 그놈들이 사라졌다. 결혼 패물과 현금 45만원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성자씨의 고모는 세상을 떠났다. 질식사라고 했다. 경찰들이 왔다. 기억나는 것은 경상도 사투리의 낮고 가는 목소리뿐이었다. 그 목소리에 대해 경찰들에게 말했다.
열흘 뒤 경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범인 체포했습니다. 3인조입니다.”
경찰서로 달려갔다. 그들 얼굴을 보려 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진범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찰들이 막았다. ‘좋지도 않은 일인데 뭐하려 만나려 하느냐’면서 말렸다. 고모 장례식을 마치고 다시 일상이 시작됐다. 누군가에게는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이지만, 성자씨의 삶은 그날 새벽 이후 달라졌다. 어두워지면 밖에를 못 나갔다. 혼자 엘리베이터도 못 탔다.
1년 정도 지났을 때 부산지방검찰청이라며 전화가 한 통 왔다. 그날 강도에게 빼앗긴 패물에 대해 물었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패물모양, 색깔이 성자씨가 잃어버린 것과 똑같았다. 자신을 천주교 교화위원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에게도 전화가 왔다. 교도소에서 제소자 상담 활동을 한다고 했다. 1년 전에 잡힌 3인조가 가짜인 것 같다고 했다. 믿기 어려웠다. 직접 교도소로 면회를 갔다. 그놈 목소리가 아니었다. 비슷하지도 않았다.
내 자식이 소중하면 남의 자식도 소중한 법이다. 자식을 낳아 길러 본 사람은 안다. 엉뚱한 아이들이 교도소에 있다니 이건 말이 안됐다. 성자 씨는 둘째 아들을 등에 업고 부산지검으로 향했다. 전화를 걸었던 검사를 만났다. 검사가 진범을 수사하며 녹음한 목소리를 들려줬다. 낮고 차분한 경상도 사투리, 그놈이었다.
2000년 10월 어느 날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재판장님, 저는 처음 법인을 잡았을 때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단서인 범인 목소리를 왜 확인시켜 주지 않았는지, 그게 참 원망스럽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빛을 보게 해주십시오.”
법원과 검찰은 ‘엎드려 빈다’는 영자씨 애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범은 그대로 세상에 있었고, 가짜 3인조들이 계속 교도소에 있었다.
부산지검 모검사
2000년 부산지검에서 근무했다. 삼례 나라슈퍼에서 할머니를 사망하게 한 진범이 따로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수사를 시작했다. 소위 부산 3인조, 이들의 자백은 범행 현장 상황은 물론이고 피해자들의 진술과도 일치했다. 게다가 이들이 훔친 패물을 매입했다는 금은방 주인까지 나타났는데, 주인이 진술한 패물과 나라슈퍼에서 빼앗긴 패물은 일치했다. 이들을 기소만 하면 일이 마무리되는 시점 지검장이 불렀다.
“사건에서 손을 떼고 부산 3인조, 전주로 보내.”
안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지검장은 작년 전주에서 근무했다. 삼례 나라슈퍼 살해범 3인조를 기소한 곳이었고, 그는 그곳의 수장이었다.
“당신 내가 부산 3인조 기소하면 책임져야 하니깐 대충 깔아뭉개려고 그러는 거지?”
감히 이런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기는 좁은 세계, 상명하복의 세계다. 까라면 까고 짖으라면 짖는 거다. 게다가 여기는 여론과 정치에 민감한 세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었다. 대전법조비리사건(1999년 1월, 부장검사 출신 이종기 변호사에게 25명의 검사들이 금품을 받은 사건)이 터졌고, 이 사건이 조용해질 때 즈음 옷로비사건(1999년 5월,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던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아내 이형자가 김태정 검찰총장의 아내 연정희에게 고급 옷을 청탁 목적으로 선물했다는 사건)이 터졌다. 검찰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윗사람들이 이 사건을 달가워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잘못되었다는 걸 고백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검사동일체 원칙상 우리 검사가 수사하는 건 누가하든 통일된 결론이 나와야 하는 데 한 사건에 대해 자칫 범인이 중복되는 결론을 가져올 수 있어.”
지검장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와 돌아보면 억울한 사법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분명 무책임하고 부적절한 사건 이송이었다.
전주지검 최검사
1999년 전주지검에서 근무했다. “삼례 나라슈퍼 강도 치사 사건”을 수사한 게 나다. 지능이 한참 떨어지는 3명의 친구가 슈퍼마켓에서 할머니를 살해했다는 사건이었다. 용의자 3명이 경찰에서 자백을 했고, 이들은 검찰에 와서도 자백을 부정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내가 수사 도중 이들에게 강압이나 폭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정하기 쉽지 않다.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아쉬움은 남는다. 완주경찰서의 수사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친구들의 말도 외면했다. 자백을 했고, 이 친구들이 죄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제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한 피의자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기도 했다. 경찰의 조서를 바탕으로, 이들이 범인이라는 심증, 정황, 증거들을 수집해 수사를 끝내게 됐다.
돌아보니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야기도 많았다. 그런데 그때는 이들이 지능이 낮아 횡설수설하는 걸로 생각했다. 피의자신문조서는 지금으로 치자면 컨트롤 c, 컨트롤 v를 활용해 작성했다.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자백 사건들은 경찰 조사 내용을 보고 미리 조서를 만들어놓는 관행이 있었다. 워낙 처리해야 할 사건들이 많아서 검찰 내부에서 묵인되던 관행이었다. 이미 조서를 만들어 놓았는데 다른 말을 하면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었던 것 같다.
사건이 종결되고 10개월 후 나는 다시 이 사건을 배당받았다. 부산지검으로부터 삼례 나라슈퍼 사건의 진범으로 의심되는 피의자들이 나타났다는 거다. 사건이 전주 지검으로 이송됐고, 윗사람들이 내게 이 사건을 다시 맡으라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내 삶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검사도 사람이다. 실수를 할 때도 있고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걸 내 스스로 바로잡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에게도 확증편향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스스로 잘못을 인정할 배포는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나한테 배당하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지금의 내게 과거의 내가 행한 일이 잘못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따지라는 거였다. 공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는 이미 “삼례 3인방”이 진범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확증이 무너지면 나도 구석으로 몰리는 거였다.
부산 3인조를 전주지검으로 소환했다. 자신들이 범인이라고 자백했다. 그러나 몇 가지 진술이 엇갈렸다. 범행도구가 뭔지에 대해 3명의 답이 달랐다. 도주경로 역시 피해자가 진술한 도주경로와 맞지 않았고, 승용차를 타고 도주했다 하는데 피해자들은 차량 시동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진술했었다. 범행 시 노면에 눈이 쌓여 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범행 하루 전 눈이 내렸다가 녹아 간선도로에 눈이 남아 있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일치하는 것도 많았지만 그만큼 일치하지 않는 사안도 있었다. 질문은 아마도 일치하지 않은 사안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거다. 그러니깐, 그들이 진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조사는 이들이 진범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질문들, 가령 기억이 흐려지거나 변경되기 쉬운 사항이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곤란한 질문으로 구성되었던 것 같다.
부산 3인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삼례 3인조를 감옥에서 불러 대질신문도 했다. 나도 모르게 삼례 3인조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희 똑바로 말해! 너네가 나라슈퍼 할머니 죽게 했잖아!!!”
삼례 3인조는 나에게 주눅이 들었는지 ‘자신들이 범인’이라고 또다시 자백했다. 이 모습을 본 부산 3인조 중 한 명이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부산 3인조들이 범행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훗날 부산 3인조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범인이라고 자백을 다 했는데, 검사님 오히려 ‘너희는 범인이 아니다’라고 말을 하잖아요. 이 상황에서 우리가 뭘 어떻게 하죠?”
그때는 삼례 3인조의 자백을 듣고 다행이다 싶었다. 부산 3인조가 범행을 부인하기 시작하면서 고맙다고 생각했다. 부산 3인조에게 “범죄 혐의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삼례 3인조에 대해 이런 부연 설명을 달았다.
“형태, 대철, 진구씨의 지능을 보면, 아이큐가 70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로 지능이 낮은 것은 사실이나, (중략) 지능이 낮을 뿐 범죄적 지능은 발달한 것으로 보여 종전의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허위 자백했다고 단정하기 어려움”
난 지금도 그 2000년을 후회한다. 1년 뒤 난 검찰을 떠나 김앤장에서 화이트컬러 범죄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2016년 전후로 언론에서 나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삼례 나라슈퍼 사건 재심이 한참 언론에 주목을 받았다. 김앤장을 그만뒀다. 재심 사건 피해자 법률대리인인 박준영 변호사가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에 나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심적 고통과 불안이 심해졌다. 나를 재심 공판에 부르지 말라 달라고 읍소했다. 우울증이 심해지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8년 법무부 산하에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또다시 내 이름이 언론에 호명되기 시작했다. 2019년 나는 박준영 변호사와 삼례3인조 피해자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지금 내게 남은 것은 아쉬움, 미안함, 후회, 우울을 넘어선 분노다. 누군가는 피해자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할 수 없느냐고 나를 질타한다. 가끔 후회한다. 그때 했어야 했는데, 건널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너버린 듯싶다.
<참고문헌>
박상규 ․ 박준영 (2016). <지연된 정의>. 서울: 후마니타스.
법무부 (2018, 12, 23). <삼례 나라슈퍼 사건 조사 및 심의 결과>. 법무부 보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