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개혁. 고백하자면 나는 검찰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어느 정도 무식하냐면, 난 검찰이 당연히 사법부 아래 있다고 생각했다(사실 이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뭐 쓸데없이 이런 생각을 해?). 어느 날 점심을 먹다가 검찰개혁 이야기가 테이블 위를 뜨겁게 데웠는데, 내가 한마디로 찬물을 끼얹었다.
“근데요, 검찰하고 사법부하고 법무부는 어떤 사이에요?”
“헐~~~”
이건 누군가에게 조국과 문재인과 윤석렬은 어떤 사이에요, 묻는 것과 같은 수위의 질문이었고, 푸들이 강아지에요, 고양이에요?라고 묻는 것과 동급이었다.
그럼 니가 아는 검찰은 뭐였냐구?
음. 검은 양복을 입은 검사들이 카리스마 쩌는 모습으로 경찰들을 진두지휘하여 나쁜 놈을 잡는다. 일단 폼에 살고 폼에 죽는 범죄 장르물의 주인공은 무조건 검사다. 검사들은 비단 범죄 현장에서만 주인공이 아니다. 법정에서도 주연 배우다. 판사가 주인공 아니냐구?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문에서 사건사고나 법조 관련 섹션을 조금만 유심히 보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다. 검사들이 나쁜 놈에게 10년을 구형하면 판사들은 좀 깎아서 5년 정도로 선고한다. 검사의 구형은 판사들 판결에 결정적 가이드라인이 된다. 검찰 구형의 50% 수준에서 선고가 통상적인 값이다.
행동경제학에 앵커링 효과라는 게 있단다. 배가 닻을 내리면 배가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은 닻과 배를 연결한 밧줄 범위 내라는 걸 경제학으로 가져온 건데. 검찰 구형 역시 닻의 역할을 한다. 아주 근엄하고 공정한 목소리로 닻을 내려버리는 거다. “어이 판사님, 얘네들 내가 10년으로 닻 내립니다? 무슨 말인지 알쥬?” 판사님들은 골무를 끼고, 마우스를 딸깍 거리면서, 열심히 사건기록을 보지만 검사들이 이미 내려버린 밧줄을 넘어서긴 불가능하다.
나같이 착한 놈(?)이 검사, 판사를 보게 되는 경우는 영화, 드라마, 언론을 통해서가 전부다. 이들이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는 크게 두 가지 경우다.
첫째, 세상의 나쁜 놈들을 추적하고 잡아내어 법정에 세웠을 때,
둘째, 스스로 나쁜 놈이 되었을 때.
어떤 경우든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은 검찰이고, 이들과 형님, 동생, 선배님, 후배님 하는 판사, 변호사들이 조연 정도 된다. 경찰을 주인공으로 하는 범죄 장르물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은 반드시 검사다. 구조적으로 경찰은 검찰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검찰에 대해 아는 건 이게 전부다. 그러다 보니 검찰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검찰개혁의 방향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가 전해지는 상황에서도, 난 할 말도 없고, 이해도 잘 안 됐다.
“이게 뭐라고 이 난리야?”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래서 심플하다. 왜 검찰개혁이 필요한지, 왜 공수처라는 제도가 논란의 쟁점이 되는지, 왜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전 법무부장관은 검찰개혁을 시대의 과제로 상정했는지를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내가 나를 납득시킬 수 있다면, 검찰 개혁을 자신의 삶과 무관하게 느끼는 또 다른 나에게도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진형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검찰개혁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한국 사회에서 고쳐지지 않는 사회적 악의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어느 분야에서나 결국은 검찰과 법원을 만나게 된다. 이들을 개혁하지 않고는 인권보호든, 경제민주화든 불가능하다. 하지만 법률 전문가가 아닌 나 같은 사람이 검찰개혁의 세세한 내용을 알고 자기 의견을 세우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 검찰개혁 법안을 둘러싼 언론 보도를 보면 좀 답답한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언론 보도 만으로는 실제 법안이 축조, 상정되는 과정에서 어떤 제도적 제약과 정치적 환경을 고려한 타협을 거쳐 개혁안이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분명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많은 저울질을 거쳐 만들어진 법안일 텐데 언론에서 마이크를 주는 사람들은 그저 자기의 원칙론적 찬반 주장만을 할 뿐이다.”
사회적 악의 뿌리를 찾다 보면 한국사회 어느 분야에서든 검찰을 만나게 된다고 검찰이 곧 악의 근원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불철주야 이 땅의 악의 기운을 척결하기 위해(불가능하겠지만..) 뛰고 있는 수많은 검사들이 너무나 억울해할 거다. 다만 한국 현대사에서 권력을 가진 악의 무리들은 자주 검찰을 수단으로 삼았고, 어느 순간 이 수단이 한국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의 최정점에 자리 잡게 되면서 “개혁”의 대상으로 정조준 됐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돈”을 교환의 수단에서 관계의 권력으로 환원시키는 과정이었다면, 근대 입헌주의의 발전은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검찰”을 국가체제의 수단에서 국가체제의 최고 권력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이었다.
어떤 영역이 과도한 권력을 가졌을 때 그 힘은 부패하고 악취를 풍기기 시작한다. 2019년 한국 검찰이 딱 그 모습이라고 많은 사람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 힘을 빼는 것, 그게 검찰 개혁의 핵심일 거다. 문제는 어떻게다. 주진형의 이야기처럼 검찰개혁의 세부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자기 의견을 세우기는 쉽지 않다. 검찰개혁이 적어도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이야기된 것이라면 지금까지 축적된 논의와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그래서 검찰 개혁으로 시끄러운 언론, SNS를 관찰하다보면 여러 질문이 든다.
공수처가 생기면 검찰개혁이 이루어지는 거야?
검찰 수사권을 조정하면 검찰개혁이 이루어지는 거야?
국회에 올라간 법안은 뭐가 문제인데 저렇게 싸우는 거야?
현재 국회에 상정된 법안을 근간으로 한 타협, 수정, 통과가 최선의 정치적 대안일까? 등등등
그런데 물음표를 마구마구 던지다보면 뭔가 공허해지면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도대체 그게 내 삶과 무슨 상관인데?”
“검찰을 개혁하면 내 삶에 뭐가 좋은 건데?”
“어떤 방식으로 검찰개혁이 되어야
내 삶이 권력과 세상이 가하는 폭력으로부터 안전해지는 건데?”
만약 검찰 개혁이 단순히 “그들만의 리그”에서 공정한 게임룰을 만들고, 반칙, 부정부패, 비리 등을 척결하는 거라면 그 리그에 낄 리가 없는 내 삶의 영역과는 무관하다. 만약 검찰 개혁이 경찰과 검찰, 검찰과 법원 사이의 권력 분배만의 문제라면 이 역시 내 삶의 영역과는 무관하다. 내가 살면서 검찰청, 경찰청, 법원을 오갈 일이 얼마나 된다고? 그리고 어디서 힘을 가지든 그게 뭣이 중한데?
이 정서는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닐 거다 우석훈 박사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검찰개혁이 필요하지만 당장 먹고 사는 문제나 교육 등 근본적 변화가 필요한 문제들에 비해 지나치게 과잉대표돼 있다.”고 진단하면서 검찰개혁을 둘러싼 젊은 세대의 정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2030세대와 386세대(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와의 사이에 도도한 장강이 흐르고 있다. 그들이 이제 뭔가를 같이 한다는 건 물 건너갔다는 뜻이다. 정서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86세대가 ‘검찰개혁을 우리 같이 노력하자’ 그러면 10대·20대는 ‘그거는 네 문제고…’ 이런 반응이다. 그들 사이에 ‘우리’라는 말이 성립 안 된다(중앙일보, 2019, 9, 30).”
사실 난 그 두 장강 사이에 끼어있는 세대다. 굳이 세대로 표현하자면 97세대(96학번에 70년대 출생)라 할까? 386세대랑 이야기하다보면 검찰 개혁이 이 시대에 풀어야 할 최고 과제로 생각되다가도 어린 후배들이랑 이야기하다보면 또다시 뭣이 중한디?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이번 이야기는 바로 이 혼란스런 상황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는 여정이다. 개혁이라는 당위적 언어는 잠시 옆으로 치워 놓고, 검찰에 집중하면서 2019년 한국 검찰 세계의 안으로 들어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