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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부메랑 Mar 07. 2023

삶의 의미에 대한 재구성

슬픈 눈을 가진 내담자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차를 타고 약 30분 정도를 가면 LA 한인타운이 나온다. 화창하고 따뜻한 날씨, 저녁이면 오렌지 색으로 물드는 하늘과 여기저기 있는 야자수들, 화려한 네온사인과 고층건물들, 거리를 계속 오가는 많은 차들로 가득 찬 차도로 둘러싸인 LA한인타운은 남가주 지역에 사는 한인들이 한국 음식이 그리워 질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 중에 하나이고, 총영사관을 비롯해 한인 관련 기관들이 많이 모여있어서 남가주 지역에 몇 년 정도 살다 보면 1년에 최소 몇 번은 가게 되는 그런 곳이다.



겉으로 볼 때는 풍요롭고 정겹고, 화려해 보이기도 하지만, LA 한인타운은 미국 내 거주하고 있는 한인이민자들의 삶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들이 많은 곳이다. 나는 심리상담사로서 LA한인타운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상대로 개인 상담이나 워크숍을 진행하며 눈물과 슬픔으로 가득 차있는 이들의 사연과 이야기를 듣고 목격해 왔다. 사업, 유학, 취업, 파견 등 각기 다른 이유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꿈을 가지고 미국에 왔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새로운 문화, 언어, 제도 등을 익히며 가까운 곳에 가족이나 친한 친구도 없이 인생을 새로 시작했다. 그리고 새 출발 한 지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이 지나면서 각자의 삶과 현실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고유한 방향으로 나아가며 굳어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한인들도 살아가는 방식과 기준들이 서로 너무 달라져서 공감대를 함께 공유하며 친목을 유지할 만한 지인을 찾기도 어려워지는 상황도 생긴다. 평범한 이민자로서는 당장 내야 하는 월세와 필요한 식비 등 기초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압박감에 자신의 감정과 건강 등을 돌 볼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앞만 보고 살다가 한인타운에서만 수십 년을 살며 20대였던 자신이 이제 벌써 50대가 되었고 60대를 바라본다고 하시는 분들을 많이 봤다. LA한인타운은 그만큼 다양한 사연과 아픔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23년이 시작되고 약 2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 어느 날 아침 내게 이메일이 왔다. 한인타운에 거주하는 여성인데 상담을 받고 싶다는 내용의 이메일이었다. 이 여성분은 공황장애 증상과 불안감으로 힘들다면 상담을 하고 싶어 했다. 곧바로 전화를 통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하지만 상담비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분은 난감해하기 시작했다. 그 분에게 상담비용은 너무나 부담되는 액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화를 끊고 디렉터와 이야기를 했는데, 디렉터는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단 Sliding scale (예비 내담자의 연수입에 따라 상담비를 할인해서 상담비를 책정하는 방법)을 적용해서 최대한 내담자의 편의를 고려해 보고, 최저 상담비도 부담스러워한다면 닥터 김에게 맡길 테니 이번 건은 닥터 김이 알아서 하세요"  


이 말은 곧 예비내담자가 최저 상담비도 내지 못할 형편이면 프로보노(무료 봉사 상담)로 상담을 진행해도 된다는 말이었다. 내가 일하는 상담소에서는 지역 봉사를 위해 각각의 심리상담사가 형편이 극도로 어려운 한 두 명 정도의 내담자에게는 프로보노로 상담을 진행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 예비내담자도 그 대상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어 첫 세션인 인테이크 세션을 포함해서 총 6회의 상담을 무료로 진행해 줄 수 있으며 그 이후에 상담을 계속 원하시면 그 때부터는 최저 상담비를 내면서 상담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여성분은 무척 기뻐하며 고마워했다. 그렇게 해서 첫 세션일정을 예약하고 약 일주일 뒤에 그 분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여성분은 재택근무를 하는 분이고 그 외 이런저런 이유로 차를 타고 내가 일하는 상담사무실로 방문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화상상담을 진행했다. 약속 시간이 되자마자 화면에 그 분의 얼굴이 나타났고, 그 분은 수줍게 웃으며 인사했다. 목소리는 맑은 목소리였는데 힘이 별로 없었고, 눈 빛은 뭔가 슬픔과 사연이 많아 보였다. 그 분이 언급한 상담 목적은 공황장애 증상과 불안감 완화였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점차 많은 이슈들이 불거져 나와서 어찌 보면 공황장애와 불안감은 말 그대로 그런 이슈들로 인한 결과로써 나타나는 증상들이고 진짜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이슈들은 따로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은 20대에 사랑하던 남자를 따라서 미국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 오자마자 그 남자가 이 분을 학대하고 난폭하게 대해서 결국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 남자와 이혼을 하고 아이를 위해 엄마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최선을 다하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치며 지금까지 미국에서 살고 있는 상황이다. 가슴에 사연이 많은 내담자는 이야기를 나눌 사람 없이 오랜 시간을 고립된 채 살아왔기에 상담시간에 내가 무엇을 묻거나 무엇을 가이드 할 필요도 없었다. 이 분은 상담이 시작되면 늘 말 그대로 자신의 이야기와 감정 등을 주르륵 쏟아냈다. 그 모습은 단지 상담에 임해서 말로 이야기를 전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뭔가가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자신 안에 있는 이야기와 감정을 표출해야만 자신이 살 것 같아서 다급하게 뭔가를 쏟아내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 날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그 분과 약속한 대로 6회의 무료 상담이 완료되었다.


이 분은 가슴이 무겁고 뜨거운 분이다. 그 동안의 고생과 슬픔, 억울함, 그리고 분노가 모두 가슴에 담겨져 있다. 그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다고 느껴서 이야기를 꼭꼭 가슴에 담아두고 오다가 결국 터져버려 공황장애 증상과 불안감으로 힘들어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공황장애 증상이 가슴의 답답함, 그리고 그로 인한 호흡 곤란인데 이 분의 표현으로는 그 답답함이 너무 심해 차라리 칼로 가슴을 째고 그 틈으로라도 호흡을 하고 싶다고 할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가늠하기도 힘들다. 지난 오랜 시간을 한인타운에 고립되어 누구에게 자신의 사정이나 감정을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생존을 위해 하루에도 많을 때는 16시간씩 일을 했다고 하니 나로서는 함부로 상상하기도 힘든 그런 고통과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6회의 상담을 하는 동안 내가 뭔가 임상적 중재를 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별로 타당하지 않고 아직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분에게 공감적 이해를 보이며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라는 말로 그 분의 가슴 더 깊은 곳에 있는 상처의 찌꺼기들을 완전히 표출하도록 도와주려고 했다. 6회의 세션을 마친 뒤, 그 분에게 조심스럽게 앞으로 최저 비용을 내면서 상담을 이어갈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 분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그 동안 일주일 내내 이 상담시간만 기다렸어요. 제 이야기를 이렇게 잘 들어주시고 저를 이해해 주셔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얼마나 치유가 될지는 모르지만 선생님과 상담을 계속 지속해 가고 싶어요"


심리상담사가 내담자에게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이런 말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이 있을까? 지난 6회 동안의 무료 상담을 진행한 것에 대한 수고를 내담자의 이 말 한마디로 보상받고 격려받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나 역시 이 분은 6회로 상담을 마무리하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컸다. 큰 도움은 아니어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분에게 앞으로 어떤 접근법과 중재, 상담전략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 분의 삶이 긍정적 변화를 이루어나가는 것을 도와줄지는 이 분과 협동하고 대화하며 결정하면 된다.


지금까지 이 분과 상담을 하며 느낀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제일 내 마음에 크게 와닿아 내가 이 분에게 받은 인상은 이 분은 이기적인 것 (Selfish)과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 (Self-interested)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굳이 구별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지는 더 봐야겠으나 이 분은 머릿 속에 자신의 행복과 웰빙을 위한 생각은 항상 뒷전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 이 분에게 앞으로 삶에서 이뤄나가고 싶고 소망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 분이 답한 3가지는 모두 타인의 행복과 웰빙을 위한 것들이었다. 자신의 부모님, 자신의 아이,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을 위한 생각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부분을 언급하며 왜 자신의 행복과 웰빙을 위한 생각은 그 리스트에 없냐고 묻자 자신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답했다. 그럼 자신의 행복과 웰빙을 지금부터 우선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떻냐고 묻자, 잠시 생각을 하던 내담자는


"내 자신의 행복과 웰빙을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것은 왠지 이기적인 것 같아요"

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다음 상담시간에 "이기적인 것"과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의 차이에 대해 내담자와 나는 더 깊은 대화를 했지만, 내담자의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상담사인 나로서는 내담자에게 변화를 강요할 수 없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내담자가 지금까지 자신의 행복과 웰빙을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후순위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알게 된 것도 좋은 변화의 출발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분과 앞으로 전개될 상담의 방향과 그 추이가 기대되었다. 내담자와 다음 세션 시간을 정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니 배가 고프게 느껴졌다. 휴게실에 가서 커피 원두를 갈고 필터 위에 부었다. 물을 끓인 뒤 필터 위로 물을 천천히 부으니 부은 물이 검고 구수한 향을 내는 커피물로 바뀌어 필터를 통과하는 게 보였다. 식빵에 버터와 딸기잼을 발라서 한 입 먹었다.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인데 날씨는 제법 추웠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왠지 커피 향이 평소보가 깊이 느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볼 때 오늘로써 나는 이 내담자와 더 깊은 라포가 형성된 것 같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빵을 먹고 있으니 상담 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생각들이 떠올랐고, 그 생각들이 더 선명해졌다. 남들의 행복과 웰빙을 우선시하는 성격. 내담자의 수줍은 듯한 미소. 내담자의 진실된 마음. 이런 것은 내게 나의 친누나를 떠올리게 했다. 나의 누나는 지금 암투병 중이다. 지난해 봄 무렵에 난소암이 발견되었었고, 치료를 받아서 잘 회복이 되었다고 모든 가족들이 믿었는데 지난 겨울 암세포가 뼈를 비롯한 다른 신체부위에 퍼져서 현재는 암말기환자로 투병 중이다.


누나는 장녀로서 동생들에게 늘 양보하고, 어른들의 애정과 관심에서는 늘 상대적으로 도외시되었지만, 늘 푸근한 마음으로 동생들을 챙겨 왔다. 얼마 전에 영종도에 거주 중이신 부모님 댁에 방문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해주시는 생선요리와 고깃국이 먹고 싶다며 말이다. 어머니는 암투병 중인 누나의 손이 꼭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손처럼 작아졌고 몸이 앙상해서 누나를 보며 하염없이 우셨다고 한다. 누나는 평소 입에서 쓴맛이 강하게 느껴져서 음식이 안 들어가는데 그 날 엄마의 음식이 먹고 싶어 온 것이다. 자신이 해준 음식을 잘 먹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엄마도 만족하셨고 안심하셨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앞으로도 자주 오라는 엄마의 제안에 누나는


"연로한 엄마 고생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요. 염치없게......"

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염치를 따지는 누나의 모습이 절로 상상되며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어찌 보면 암말기환자가 되어서도 남을 극도로 배려하는 누나의 모습에서 내담자의 모습이 강하게 오버랩되는 것을 느낀 것이다 나는.


나는 멀리 한국에서 암투병 중인 누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한인타운에서 오랜 시간 고립된 채 힘들게 지내온 내담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작고 적은 것들이다.

빨리 휴가를 내어 한국을 방문해서 누나를 만나고 싶다. 그래서 누나의 행복과 웰빙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있는 만큼 해주고 싶다.

내담자와 세션을 진행하며 이 분의 삶의 동반자적 목격자가 되고 싶다. 이 분에게 변화를 유도하기보다 이 분이 살아온 경험과 이야기를 목격하고 기억하며 이 분이 장차 삶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해 가도록 조금이나마 도와주고 싶다.


겸손한 마음으로

담담한 마음으로

한 인간으로서 이들과 동행하고 싶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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