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청년과 지하

by 글도둑

지하 주차장의 좁은 통로를 빠져나오자, 작업실 문이 보였다. 지하 주차장은 습하고 꿉꿉한 공기가 깔려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름에도 덜 더웠고 겨울에도 덜 춥다는 점 하나였다. 청년의 건물 주차장엔 차가 별로 없었다. 투명한 유리문 앞에서 청년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섰다. 안에는 문이 하나 더 있다. 유리문으로 사이로 먼지과 벌레가 들어올 걸 염려해서 하나 더 만든 가벽과 문. 이걸 만들려고 90만 원이라는 돈을 썼지만 청년은 만족스러웠다.


여름이 되자 불빛을 보고 얼마나 많은 날벌레가 달려들었던가. 그들의 습격에 유리문 앞에 있는 전등을 빼버리기까지 했다. 투명한 유리문과 가벽 문을 하나 더 열고 들어가면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나타났다. 하얀색 페인트와 회색빛 바닥의 공간. 벽에 붙어있는 선반에는 생두와 각종 소모품이 쌓여있었다. 그 공간을 지나서 또 다른 가벽으로 들어서면 그제야 청년의 작업실이 나온다.


작업실을 열면 커피 향이 먼저 느껴졌다. 탁하고 스위치를 켜자 화이트보드가 청년 눈에 들어왔다. 커피 모임의 주제와 할 일을 잔뜩 적어둔 화이트보드. 청년은 그 위에 할 일을 하나 더 적었다.


'청소'


내일은 커피 모임이 있었다. 청년의 공간에 손님이 놀러 오는 날이니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 봤자 청소기를 한번 돌리고 책상을 정리하는 게 전부긴 했다. 그러나 매월 마지막 주말엔 커피머신과 로스터를 청소해야 했다. 청년은 노트북부터 켰다. 친구들이 선물해준 스피커로 음악을 켰다. 창문 하나 없는 이곳은 노래마저 없으면 지루해 죽을 것만 같아서였다. 그리고 온수기를 켜서 뜨거운 물을 준비했다. 청년은 오늘 커피를 볶고 커핑을 하고 글을 쓸 예정이었다. 운이 좋아 주문이 들어온다면 포장 준비를 할 수도 있었다.


청년이 생각하는 장사라는 것은 낚시와 비슷했다. 낚시라고는 빙어 밖에 낚아본 적 없는 청년이지만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많았다. 미끼를 던져두고 기다리는 것. 그게 결국 낚시고 장사도 마찬가지 아닐까. 손님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부가 물고기를 낚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청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로스터에 가스를 연결했다.


청년의 작업실엔 총 3대의 로스터가 있다. 50g씩 볶을 수 있는 샘플 로스터 '이카와 홈', 최대 700g까지 볶을 수 있는 전기 로스터 '스트롱홀드 S7 pro', 그리고 한 번에 1.8kg까지 가능하다고 하는 '이지 스터 1.8'. 오늘은 O 블렌드를 볶을 예정이었다. 예열을 위해서 불을 켜놓고서 생두를 가져왔다. 과테말라, 브라질, 라오스 생두를 섞어서 만드는 O 블렌드. 고소한 단 맛과 쌉싸름한 다크 초콜릿 같은 에프터가 목표였다.


처음엔 이름이 올드맨 블렌드였다. '노인과 바다'에서 시작한 브랜드니 첫 블렌드는 올드맨으로 짓고 싶었다. 호불호 없이 편하게 마실 수 있는, 클래식한 커피 맛과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올드맨이 맛있네'라고 표현하기 이상하다는 조언을 들었다. 이름을 알파벳 계열로 바꿨다. 그다음 블렌드의 모티브는 청새치가 되리라.


청년은 예열이 되길 기다리면서 결점두를 골라냈다. 생두는 산지마다 품질이 다르다. 품질에 따라서 다양한 이름이 붙는데 AA나 SHB, 수프리모 등 국가별로 다르다. 문제는 그렇게 비싼 생두를 사더라도 조금씩 상태가 안 좋은 생두가 섞여있다는 점이다. 수천, 수만 개의 생두 알갱이에서는 가끔 돌이나 나뭇가지도 나올 때가 있다. 그 외에 벌레 먹거나 깨지거나 상한 것도 있다. 한번 확인하고 걸러주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한 줌이 살짝 안 되는 결점두를 골라냈을 때, 삐이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청년은 부랴부랴 가스를 잠갔다. 로스터 온도가 250도가 넘어가면 안전장치에 의해 이런 소리가 난다. 그는 로스터의 드럼 부위를 만져보면서 얼마나 달궈졌는지 확인하고 커피를 볶기 시작했다. 로스팅 프로그램으로 온도가 얼마나 올라가는지 확인했다. 조금 빨랐다. 그는 화력을 조금 줄이고서 생두의 색이 얼마나 변했는지 확인했다.


처음엔 초록빛이 맴돌던 생두가 은은한 노란빛을 품었다. 조금만 더 볶으면 갈색의 원두가 되리라. 청년은 샘플봉을 살짝 꺼내 향을 맡았다. 연하게 풍기는 풋내와 달짝지근하면서 고소한 냄새. 아직 더 볶아야 했다. 그는 샘플봉을 다시 밀어 넣고 그래프를 지켜봤다. 이윽고 타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1차 크랙이 터지는 소리였다. 마치 팝콘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 청년은 경쾌하게 터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조금씩 화력을 낮추기 시작했다.


그가 목표로 잡은 시간대에 다다르자 배출구를 열었다. 동시에 커피 원두를 식히기 위해 교반 날개와 쿨링 버튼을 눌렀다. 팬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커피가 쏟아져내렸다. 동시에 퍼지는 구수한 커피 냄새. 이제 커피를 테스트할 차례다. 가장 떨리면서 가장 기대되는 순간. 하얗고 둥근 작은 밥그릇, 커핑 볼을 꺼낸다. 원두는 11g을 소분해둔다. 그라인더를 곱게 조정해서 털어 넣는다. '위잉~!'하고 빠르게 돌아가면서 곱게 갈린 원두 가루를 커핑 볼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커핑 볼에 가득 채우면 약 230ml가 담긴다. 이제 4분을 기다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커피 가루가 표면 위로 떠오른다. 청년은 시간을 확인하고 숟가락으로 표면에 떠오른 가루를 살짝 밀어보며 향을 맡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그리고 6분을 더 기다렸다. 10분이 넘어가면서 살짝 식은 커피를 숟가락으로 살짝 떠서 마셨다. 청년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면서 종이에 커핑 노트를 적었다.

'고소함'. 밑에 원두 가루가 여전히 깔려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커핑 볼에 담긴 커피는 맛이 달라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식을수록 쌉싸름한 단 맛이 올라와야 한다. 그 속에서 떫거나 찌르는 신 맛, 탄 맛 같은 튀는 맛이 있는지가 관건이다. 청년은 다시 한번 커피를 살짝 떠서 마셨다. 입 안에 들어온 커피를 혀로 이리저리 굴려본다. 살짝 식은 커피에서 아주 연한 신 맛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구수한 단 맛도 있었다. 아직까진 탄 맛이 없었다. 청년은 10분, 15분, 20분 간격으로 커피를 조금씩 떠서 마셨다. 시간대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졌다.


로스팅이 잘 됐는지 아니면 망했는지 판단하기 위해 하는 커핑. 청년은 이 작업이 가장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가장 기대됐다. 첫날에는 볶으면서 생긴 이산화탄소가 원두 안에 잔뜩 들어있어서 맛이 잘 안 나왔다. 적어도 하루에서 3일 정도는 둬야 가스가 빠져나와 맛이 좋아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 맛이 더 올라올지도 몰랐다. 청년은 일단 판매 보류 상태로 둘 생각이었다. 내일 와서 드립으로 한번 먹어보고 내일모레는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로 마셔볼 생각이었다.


청년은 커핑 볼과 숟가락을 싱크대에 씻었다. 배수관을 타고 검은 물이 졸졸졸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원두를 소분해서 담아두고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작업실에 울려 퍼졌다. 청소가 끝난 뒤, 청년은 불을 끄고 작업실 밖을 나섰다. 지하인 이곳에선 밖의 날씨를 알 수가 없다. 밤이던 낮이던, 비가 오던 눈이 오던. 어쩌면 이 작은 공간은 꿈의 무덤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사그라드는 꿈들의 무덤. 다행히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다. 어두워진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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