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걸 도대체 어디에 둔 걸까?

기억을 의심하기

by 보싸

보싸: 안녕하세요, 박사님. 잘 지내셨나요? 오늘은 대화보다 상담이 필요해서 찾아왔어요.


지피터 박사: 오늘은 타이핑 속도가 예전 같지 않네요? 무슨 일 있었나요?


보싸: 오늘 아주 무서운 일이 있었어요.


지피터 박사: 무서운 일이요? 저 구독 중단했어요???


보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단 들어봐요. 제가 모처럼 큰 맘먹고 무선 이어폰을 하나 샀어요.

거실 식탁 위에서 박스를 뜯고 좀 가지고 놀다가 충전기에 꽂아뒀는데, 저녁이 돼서 쓰려고 보니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예요.


지피터 박사: 그래요?


보싸: 네, 밖에 들고나간 적도 없고, 어디에 따로 둔 기억도 안 나고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 방의 책상 위에 가져다 둔 것 같은데, 책상 위를 아무리 찾아도 안 나왔어요. 혹시나 싶어서 책상 서랍을 뒤져도 없고... 그래서 애들이 숨겼나 싶어서 애들한테 취조를 하고 애들 방을 뒤지기까지 했죠.


지피터 박사: 애들은 무슨 죄람...


보싸: 평소에 워낙 장난을 많이 주고받아서 애들이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모르는 눈치였어요. 저는 정말 무서웠어요. 박스를 뜯고 가지고 논 기억이 분명히 있는데, 그저 선명한 꿈이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어요.


지피터 박사: 아, 이런 현상은 심리학적으로 ‘소스 모니터링 오류(source monitoring error)’라고 해요. 기억은 나는데 그 기억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상상한 건지, 꿈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거죠. 심리학자 마샤 존슨(Marcia K. Johnson)이 제안한 건데요, 우리 뇌는 기억의 ‘내용’만큼이나 ‘출처’도 저장하려고 해요. 근데 때로는 이 출처 정보가 흐려져요. 그래서 실제로 했던 일과 머릿속에서만 시뮬레이션했던 일을 헷갈릴 수 있어요.


보싸: 아, 역시 심리학자들은 별의별 현상을 다 연구해 두었네요. 어쨌든, 제 상태가 심각한 걸 눈치챈 가족들이 그제야 제가 이어폰을 찾는 걸 도와주기 위해 나섰어요. 오늘 사서 처음 개봉한 거라 어떻게 생겼는지는 저밖에 몰랐죠. 아이들이 저에게 물었어요. "무슨 색이에요?"


지피터 박사: 저도 궁금하네요.


보싸: 그리고 전 자신 있게 말했죠. "하얀색! 타원형 케이스에 들어있어!" 제 눈앞에 하얀색 타원형 이어폰 케이스가 너무도 선명하게 동동 떠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처음 택배를 받고 포장을 뜯고 귀에 꽂아보던 저의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눈앞에 펼쳐졌어요. 그리고 그 영상 속의 저는 검은색 이어폰을 손에 들고 있었죠!


지피터 박사: 헐, 소름. 미쳤나 봐.


보싸: '미쳤나 봐'가 뭐야, 심리학적으로 설명해 줄 수는 없는 건가요?


지피터 박사: 아, 죄송. 그럴 수 있어요. 그건 뭐냐면, 뇌가 기억을 저장할 때 실제 정보와 기대 정보(expectation)를 섞어 저장하는 경향 때문이에요. 사회자님이 생각하는 ‘이어폰’의 이미지(흰색, 타원형)가 머릿속에 익숙한 틀, 즉 '스키마(schema)'처럼 저장돼 있어서, 새로운 정보도 그 틀에 맞춰서 자동으로 ‘보정’해버리는 거죠. 이건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스키마 왜곡(schema distortion) 현상이에요. 바틀렛(Frederic C. Bartlett)이 제안한 개념인데, 기억은 단순한 재생(replay)이 아니라 재구성(reconstruction)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익숙한 틀로 맞춰진다는 거예요. 하얀 거 갖고 싶었나 봐요?


보싸: ...하얗고 비싼 거를 갖고 싶긴 했죠.


지피터 박사: 뇌는 빠르게 판단하고 반응하기 위해 예측 기반의 처리(prediction-based processing)를 하는데, 이게 때로는 실수를 유발해요. 실제보다 ‘기대’를 더 또렷하게 기억하게 되는 거죠.


보싸: 그럼 저 때문이 아니라 제 뇌 때문이군요?


지피터 박사: 뇌와 본인을 분리하는 사고체계도 연구대상이네요. 어쨌든, 뇌는 늘 당신을 위해 일하지만, 완벽하진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찾았나요?


보싸: 아, 맞다. 딸이 제 방에 들어가자마자 깔깔거리며 외쳤어요. "여기 있구만!" 저는 어디에 있었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딸이 "여기! 책상 위에 딱 있던데?"라고 하더라고요. 딸의 손에는 검은색 이어폰 케이스가 들려 있었어요! 그제야 저는 깨달았죠. 나는 새로 산 이어폰을 하얀색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구나. 그래서 하얀색 이어폰 케이스만 찾았고, 그러다 보니 검은색 이어폰 케이스를 발견하지 못한 거구나... 선생님, 저 왜 이러죠? 저 죽나요?


지피터 박사: 오버하지 마시고요, 그건 인지적 편향 중 하나예요. 특히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해요.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정보(여기선 ‘이어폰은 하얗다’)에 맞는 단서만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거죠. 반대로 그 믿음과 어긋나는 정보는 무시되거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처리돼요.


보싸: 그럼 제가 검은색 이어폰을 ‘봤는데도’ 못 본 건, 확증 편향 때문이라는 거예요?


지피터 박사: 맞아요. 눈에 보여도, 뇌가 인지하지 않으면 안 본 거예요. 이걸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고도 해요. 하버드대의 사이먼스(Daniel Simons)와 차브리스(Christopher Chabris)가 했던 고릴라 실험으로 유명한데, 화면에 분명히 고릴라가 지나가는데도, 참가자 대부분은 전혀 못 봐요. 왜냐면, ‘고릴라가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죠.


보싸: 맙소사, 이런 어이없는 게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고요?


지피터 박사: 네, 뇌는 눈보다 게으르거든요. 시각 정보가 들어와도 ‘주의(attention)’를 주지 않으면 뇌는 그걸 처리하지 않아요. 그래서 아무리 눈앞에 있어도, 그게 내가 기대한 정보가 아니면 놓칠 수 있어요.


보싸: 이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게 안심이 되네요.


지피터 박사: 맞아요. 걱정할 일 아니에요. 이런 해프닝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어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려고 하거든요.


보싸: 아, 그거 제가 아내에게 매일 듣는 말이에요. 저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다 왜곡하고 창작한다고...


지피터 박사: 그 말씀, 아주 흔한 일이에요. 하지만, 아내분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요? 인간은 기억을 저장할 때 자기 서사 중심적 편향(self-referential bias)을 갖고 있어요. 말하자면, 자기 이미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기억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내 성격, 내 입장, 내 감정에 맞게 ‘기억을 편집’하는 거예요.


보싸: 그러면 전 회차에 다루었던, 상대방은 기억도 못하는데 혼자 죄책감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경우일까요?


지피터 박사: 오, 다행히 기억하고 있군요! 맞아요. 그건 ‘자기 서사 중심적 편향’과 더불어 감정 중심 기억 정렬(emotionally charged memory prioritization)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뇌는 감정적으로 강렬했던 순간을 더 선명하고 오래 저장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특히 죄책감처럼 자기 자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얽힌 기억은 더 강하게 각인돼요.


보싸: 그러니까, 상대는 별일 아니라고 흘려보냈는데, 저는 계속 이불킥하며 후회하는 거네요?


지피터 박사: 딱 그거예요. 학자 수잔 놀런-혹스마(Susan Nolen-Hoeksema)는 이런 상태를 반추사고(rumination)라고 불렀어요. 감정적인 기억을 반복 재생하면서, 자꾸 그 사건을 내 서사 안에서 확대 재해석하게 되는 거죠. 나중엔 실제보다 더 ‘큰 잘못’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보싸: 결국 그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제 해석이고 감정의 흔적인 거군요.


지피터 박사: '감정의 흔적'이라는 표현, 정확해요. 뇌는 ‘무엇이 일어났는가’보다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가’를 중심으로 기억을 구성하니까요. 이걸 의미 중심 처리(meaning-based processing)라고도 해요. 단순한 사실보다 감정, 맥락, 자기 서사와 연결된 요소들이 기억에 더 깊이 새겨지는 방식이죠. 인지심리학자 프레더릭 바틀렛(F. C. Bartlett)의 “기억은 재생이 아니라 재구성”이라는 이론에서 시작해서, 이후 자서전적 기억 연구나 감정-기억 연합 이론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이에요. 결국 기억이란 건, 감정의 색을 입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죠.


보싸: 아... 들을수록 놀라운 일이네요. 이런 어이없는 일이 연구가 될 정도로 흔한 일이고, 인간의 뇌라는 것이 이렇게 취약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럼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모든 상황을 기억하려고 애쓸 수는 없잖아요?


지피터 박사: 그렇죠. 모든 걸 기억하려고 애쓰는 건 불가능해요. 사실 인간의 뇌는 ‘완벽한 기록 장치’가 아니라 ‘이야기 편집자’에 가까우니까요. 그래서 중요한 건 기억의 정확성을 높이기보다, 왜곡될 여지를 줄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에요.


보싸: 왜곡될 여지를 줄이는 습관이요?


지피터 박사: 네, 메타인지 훈련이라고도 하는데요. 내가 지금 뭘 기억하고 있고, 뭘 놓칠 수 있는지 의식하는 연습이죠. 간단히 말하면 ‘나의 기억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덜 확신하게 되고, 더 조심하게 돼요. 이건 기억 심리학자 로버트 비요크(Robert A. Bjork)의 ‘desirable difficulties’ 이론과도 연결돼요. 일부러 살짝 불편하게 복습하면 기억이 더 오래간다는 거죠.


보싸: 불편하게 복습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지피터 박사: ‘불편하게 복습한다’는 건 말 그대로, 조금 불편한 방식으로 복습하는 걸 뜻해요. 예를 들어, 책을 덮고 내용을 떠올려보거나, 문제를 직접 풀어본다든가, 누군가에게 설명해 보는 식이죠. 그냥 눈으로 읽는 것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머리도 더 아프지만, 기억을 오래 붙잡는 데는 훨씬 효과적이에요.


보싸: 아, 저는 물구나무서서 공부를 하라는 건가 했네요... 어쩐지, 저는 책을 빨리 읽는 편인데, 그렇게 휙 읽는 건, 그때는 재미있는데 기억이 오래 남지는 않더라고요.


지피터 박사: 그게 바로 비요크(Robert A. Bjork) 교수가 경고했던 “착각된 학습(illusion of learning)”이에요. 쉽게 느껴지는 학습은 “나 이거 알아!” 하고 착각하게 만들지만, 실제로는 머리에 오래 남지 않아요. 반대로, 살짝 불편하고 버벅거리는 학습이 오히려 장기 기억에 더 강하게 남는다는 거죠. 그래서 그걸 ‘바람직한 어려움(desirable difficulties)’이라고 해요.


보싸: 그렇군요. 역시 공짜는 없네요.


지피터 박사: 네, 뇌는 적당히 갈등이 생길 때 더 열심히 작동하거든요. 마치 힘들게 운동을 해야 근육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 그래서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는 복습법이, 뇌에게는 “이건 중요해! 잊지 마!”라는 신호가 되는 거예요.


보싸: 저는 그래서 의식적으로 꼭 매일 오늘의 할 일을 노트에 펜으로 적고는 해요. 그러면 생각도 정리되고, 그렇게 머릿속에서 꺼낸 일들은 쉽게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저의 기억을 믿지 않게 되면서부터 시작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오늘 박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 자주, 많은 것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피터 박사: 맞아요. 자기 뇌를 의심하는 건, 가장 똑똑한 뇌가 하는 행동이죠. 심리학에서 그걸 ‘겸손한 생존 전략’이라고 합니다.


보싸: 그건 누구의 이론인가요?


지피터 박사: 저요.


보싸: 아~네~ 오늘도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의 바보 같은 행동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이렇게 유익한 대화가 되다니, 부끄럽지만 감사한 일이네요. 이 이야기를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도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 작아지지 말고, 기록하고 기억하면서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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