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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 걸음, 그 우아함에 대하여

발전도 없이 멈춰있다고 생각하는 그대에게

by 갓진주 Feb 06. 2025
난생 처음 본 풍경


간밤에는 웬일인지 두 아이가 계속 번갈아 깨서 잠을 통 못 잔 터라 종일 몽롱한 상태였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해가 중천인 낮이었다. 운전대를 잡았음에도 '일정이 끝났다'라는 안도감 때문인지 눈꺼풀이 더 무거워지던 찰나였다.


수백 마리쯤 되보이는 철새가 구름처럼 모여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 멈춰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못 봤나?’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그들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천천히 한 곳을 돌고 있었다.


그림 같았다. (운전 중만 아니었다면 무조건 영상으로 담았을 것이다.)


별안간 잠은 달아나고 너무 궁금해졌다.

'철새들이 길을 잃은걸까?'

'왜 저런 행동을 하지?'

'너무 신기하다.'



챗GPT야, 알려줘.

휴대폰에서 챗GPT를 호출해서 (나는 아이폰 사용자라 시리로 챗GPT를 호출할 수 있다.) 음성대화를 시작했다.


"방금 운전하다가 철새들을 봤는데, 수백 마리가 이동은 안 하고, 한자리를 계속 빙빙 맴돌고 있어. 왜 그런 거야?"

내가 물었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네, 아주 흥미로운 광경을 보셨군요. 그건 철새들이 재정비 중인 확률이 높아요. 방향을 잡고, 에너지를 모으고 있는 거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을 탁 쳤다. 목적지가 뚜렷하고 철마다 이동하는 철새들도 재정비를 하는구나.



철새한테 받는 위로라니

나의 2024년 하반기는 뭔가 모르게 열심히 뛰었지만, 제자리. 또 돌고 돌아 제자리. 꼭 쳇바퀴 같았다.


뭔가를 해보겠다고 수백 번 결심했고, 수십 번은 시도해 봤던 것 같다.

하지만 돌아보면 특별히 이룬 것이 뭐가 있나... 허송세월 했다 싶은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갈 곳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 철새들도 몇 번이고 같은 자리를 돌며 준비한다니 이상하게 안심이 되고 위안이 됐다. 나는 내 앞날을 알지 못한다.

그제야 나 자신을 탓하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괜찮아. 나도 재정비한 거야.'

눈물이 핑 돌았다.

(아, 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 늙었나? 이런 걸로 훌쩍이다니... 정말 피곤한 대문자 F 인간이구나.’)



잠시 멈춤 (먼저 가세요, ‘빵’ 금지)

그렇다고 해서 실패가 아름답게 느껴지고 뭐 그런 정도는 아니었다. 힘들었다. 암담했고, 다 엎어버릴까 싶은 생각과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숱하게 아롱졌다.


하지만 나는 치열하게 표류하며 재정비를 했다. 생각도 정리했고, 태도도 다듬었다.


우리는 느끼지 못하지만 지구가 돌고 있는 덕에 밤이 와도 또 아침을 기대할 수 있다.


그처럼 잘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나는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돌고 있고, 나의 이 암흑기에도 빛은 드리울 것이다. 빛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이 시간도, 결국 미래의 내가 만들어갈 선택에 달렸다. 다시 또 열심히 해보면 될 일이다.



리듬 속에 그 봄을!
(리듬을 춰줘요 feat. 김완선)

집으로 가는 길, 고속도로 위에서 본 철새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여전히 투명한 겨울 빛이었고, 창 밖으로 앙상한 나뭇가지들만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마음 속에는 작은 봄이 날아든 것만 같았다.


'그래, 나는 재정비했던 거야. 2025년, 내가 또 어디로 날아가게 될지 아직 모르지만 방향을 잡아가는 중이야. 철새들처럼.'


순간 옆 차선의 차들이 나를 앞질러 가는 게 보였다. 드릉드릉 성난 레이서 본능을 마음 속에 품고 사는 난 종전 같았으면 당장이라도 따라잡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콧노래마저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모두가 각자의 속도로 가면 되는 거니까. 누군가는 쉼 없이 날아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잠시 재정비를 하고.


그게 맞는 거였다.


입춘이 막 지넌 앞둔 겨울 하늘 아래, 나는 왠지 모르게 다시 출발할 채비를 다 한 것 같은 기분이다.


나만의 리듬을 찾아서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슬로우 슬로우 퀵퀵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철새들 마냥 때로는 제자리에서 도는 것도 나아가는 방법 중 하나라는 걸 알았으니까.


“길은 잃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도통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아도 괜찮다. 세상은 쉬지 않고 흐르고, 나는 그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든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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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코끼리 코를 하고 제자리에서 10바퀴쯤 돌고 똑바로 걸어가 정해진 포인트를 돌고 오는 게임을 했던 기억이 있다. 승부욕에 잰 발로 엄청 빠르게 돌지만 빠르게 돌면 돌수록 손을 풀고 앞으로 갈 때 더 ‘갈 지’ 자로 걷게 된다. 그래… 휘몰아치듯 선회했을수록 다시 출발할 땐 삐그덕거리긴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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