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그 자리에 서는 것뿐일지라도
2024년 연예대상 시상식.
데뷔 29년 차 배우가 신인상을 받았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 동안의 오열 끝에 꽃다발을 든 손을 떨며 마이크를 잡았다.
만약에 지금 저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어떤 일을 굉장히 열심히 하다가
주저 앉아서 울고,
또 입술이 부르트도록 고민하고 계신 분들이
얻을 수 있는 기회가
고작 그 자리에서 서는 것 뿐일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강희.
그의 눈물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월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3년간 연기를 쉬었다. 아니, 그만둔 것이다.
연기가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억지로 해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불안했다.
버티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버틸수록 더 무너졌다.
결국, 연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고깃집에서 설거지를 했다.
가사도우미로 일했다.
월수입 140만 원.
화려했던 스포트라이트는 멀어졌다.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흔히 쉽게 이런 말을 한다.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
'실패를 발판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진짜 번아웃을 겪어 본 사람은 안다.
바닥이라 생각했던 곳보다 더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몰라 더욱 두려워진다.
번아웃은 단순한 피로나 스트레스가 아니다.
며칠 쉰다고 회복되지 않는다.
임상 심리학자들은 번아웃은 이렇게 정의한다.
첫째, 극심한 소진.
둘째, 성취감의 상실.
셋째, 자아의 상실.
이 단계까지 오면, 쉬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심각한 번아웃을 겪은 사람들 중 25~50%는 4년이 지나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다.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지고,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도 느려진다.
일상적인 업무조차 버거워질 수 있다.
나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예전으로 돌아가는 게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깊은 번아웃을 겪는 사람들은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깊은 번아웃에 바진다.
임상 심리학자이자 번아웃 전문가 아르노 반 담(Arno Van Dam)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번아웃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1. 스트레스의 신호를 무시한다.
2.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3.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한다.
노력이 부족하다 생각해서 계속 가속 페달만 밟을 뿐이다.
하지만 더 달릴수록, 더 무너진다.
그리고 결국, 몸이 강제로 멈추게 한다.
그 순간이 바로 번아웃인 것이다.
최강희는 신인상을 받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포기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성공의 메세지가 아니다.
"우리, 다시 날아오를 수 있어요!"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저 무릎을 세워 그 자리에 서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 사회는 번아웃을 극복하고, 다시 성공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하지만 진짜 회복은 '성공'에 있지 않다.
예전보다 더 높이 날 필요 없다.
더 빠르게 성장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다시 내 방식대로 내 속도대로 살아가면 된다.
“길은 잃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지금 주저앉아 있다면,
아직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작은 마음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대단한 사람이다.
번아웃은 마치 ‘나는 성실한 사람이다’라고 자부하며 밤새워 일하다가, 어느 순간 ‘나는 멍청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메일 알림이 울리고, 나는 또 분주 떨며 일을 시작한다.
멍청한 걸까? 아니면 그냥 지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