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목표: 선택 장애 퇴치
선택을 미루는 기술
메뉴판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앞에 앉은 친구를 바라봤다.
“너는 뭐 먹고 싶어?”
늘 하던 질문이었다. 그날따라 그 질문이 이상하게 공허하게 울렸다.
“너 먹고 싶은 걸로 해.”
아, 이 익숙한 대답. 처음엔 ‘와, 배려심 깊은 친구구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다. 이건 배려가 아니라 책임을 나에게 슬쩍 미루는 기술이었다는 것을.
내가 두 사람 몫의 선택을 짊어진다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음식이 맛있으면 다행이지만, 별로인 경우엔 알게 모르게 친구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래도 워낙 같은 패턴이 계속됐던 터라 메뉴를 골라야 할 때면 “내가 알아서 시켜?”라는 말이 자연스레 튀어나왔고, 친구는 매번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참여는 할게, 결정은 네가
너무 지쳐있었던 어느 날이었다. 예상 가능한 절차는 건너뛰고 싶었다. 내가 주문하려던 찰나 친구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왜 물어보지도 않고 시켜?"
순간 멍해졌다. 당황스러웠다.
‘아니, 넌 한 번도 네 입으로 네가 먹고 싶은 걸 말한 적이 없잖아!’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삼켰다.
대신 물었다.
“너… 뭐 먹고 싶었는데?”
“몰라. 근데 물어보지도 않고 정한 건 좀 그렇잖아.”
아니, 이게 무슨 논리야? 메뉴판은 15분 동안 들여다보면서 뭘 먹을지 못 정해놓고, 내가 고르니 갑자기 섭섭하다니. 메뉴를 고르지 않을 자유는 누리면서도, 자신이 선택 과정에서 빠진다는 건 불편하다는 거였을까.
어쩌면 친구는 “물어봐주는 행위” 자체를 중요한 예의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뭘 먹을지 정하지는 않아도, 그 선택의 순간에 자신이 배제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사소한 일일수록 그 안에 누군가의 마음을 담아주는 게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
아무거나 좋아하다가는
우리는 종종 선택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한다. 왜? 귀찮으니까.
“아무거나.”
“네가 알아서.”
“난 상관없어.”
이 말들은 순간 엄청난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 대가로 작은 주도권은 조금씩 잃게 된다.
그리고 주도권을 잃을 때, 취향도 흐릿해진다.
선택은 사실 거창한 게 아니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부터 퇴근길에 어떤 노래를 들을지 정하는 일까지, 하루는 작은 선택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 선택들을 미루기 시작하면, 내 삶은 타인의 취향과 관성에 끌려가기 시작한다. 내 삶이 남의 메뉴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아주 사소한 실험
나는 아주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오늘 나는 뭘 먹고 싶지?”
처음엔 정말 어색했다. 굳이 “먹고 싶은 것”이 없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마치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근육을 다시 사용하는 것 같았다.
몇 번 반복하다 보니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고기를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고 잘 말하는 편인데, 회를 먹고 싶을 땐 왠지 주저했다. 고기보다 회가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다 보니. ‘나는 스스로도 배려하지 않으면서 남 눈치만 보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에는 강한 확신을 갖는다. 나는 계피를 엄청 싫어한다. 내가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에서는 새벽 예배 후에 1층에서 계피차를 나눠줬다. 당시 코를 찌르던 생강 냄새에 2층에서부터 코를 막고 후다닥 도망치든 달려 내려가 문을 박차고 나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도 계피가 들어간 음식은 손도 못 대겠다. 심지어 계피 가루 뿌린 츄러스도 싫다. (으)
진짜 모습을 마주하고 싶다면
결국, 선택은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조각이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어떤 것을 선택했는지가 우리의 삶을 조금씩 쌓아 올린다. 작은 선택들이 나를 보여주는 거울이 되고, 그 거울이 점점 선명해지면 우리는 어느새 그 거울에 비친 더 단단하고 ‘나 다운 나’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완벽한 선택’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이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그 어느 날의 고추장을 너무 많이 넣은 비빔밥 한 그릇도, “다음엔 적당히 넣어야겠다”는 나만의 기준을 새우는 계기가 되는 것처럼.
그러니 선택 앞에서 "선택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지 말자.
실패는 나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알려주는 힌트일 뿐이다. 그리고 실패한 선택은 결국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고.
사소한 선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분명히 배우고, 성장하고 새롭게 빚어질 것이다. 오늘 이런 글을 쓰겠다고 내린 나의 이 사소한 선택이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울림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작은 선택이, 작은 발견이 어쩌면 당신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진짜 당신의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길은 잃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아무거나'라고 외치지 말고, ‘아무거’라도 먼저 선택해 보면 된다.
메뉴를 고를 때 너무 오래 고민하지 말자. 실패한 메뉴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남고, 성공한 메뉴는 내일의 기준이 되니까. (난 어제 먹었던 돼지갈비가 너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