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소유를 열망하게 된다
삼청동에서 광화문 역까지, 구불구불 이어진 길고 느린 길. 도화지 같은 가슴에 커다란 동그라미 모양으로 오려진 채, 터덜터덜 빠져나왔다. 두 발과 양 무릎은 중력에 꽁꽁 묶여 어쩔 줄 모르고, 어깨는 세모가 되었다. 6시를 넘긴 시각, 집에 도착하면 늦은 저녁일 듯했다. 문자가 왔고 나침반은 보다 정확해졌다. 집으로. 날 기다리는 나에게로.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 있어서 미안했다. 예쁜 가게들, 커피숍들, 작은 미술관, 그리고 다시 시선을 머물게 하는 쇼윈도. 걸음을 잠시 멈췄다.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머무르게 되었다. 어떻게 읽더라. 낯선 브랜드였다. 전에 아내가 말해주었던. 꽃무늬가 화려했던. 영국 찻잔 같기도 한. 하늘색 배경에 붉은색 타이포그래피. 문을 열었다. 점원은 내내 친절했다. 앞치마 앞에서 정지해 있었다. 그녀는 요리를 좋아한다. 가격은, 고려할 문제였지만 벽은 아니었다. 사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무엇보다 이 상점은 집 근처에도 회사 근처에도 없는 곳이었으니까. 빨간색 바탕에 하얀색 물방울무늬가 있었고, 아르헨티나 국기처럼 하늘색과 흰색 줄무늬에 자주색 꽃잎, 초록색 잎사귀 그림 패턴이 주욱 선을 이루고 있었다. 선택했고 포장했다. 그전에 들고 있던 진한 초콜릿 조각 케이크와 다이어리를 함께 담았다. 문을 나섰고 퇴근 차량을 지나 다시 광화문 역으로 향했다. 건물 유리들이 유난히 반짝였다.
기다리고 있더라.
늦어서 미안했다. 그녀도 회사에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고, 음식들은 빨간색 식탁, 귀여운 식기에 알록달록 담겨 있었다. 사 온 것들을 내밀었다. 그녀는 좋아했다. 아주 많이. 소리도 질렀다. 케이크도 맛있다고 포크를 쉬지 않았다. 앞치마는 입어보고 블로그 이웃들에게 자랑한다며 사진도 찍었다. 다행이었다. 좋아해 줘서. 고마웠다. 그런데 며칠 후 알았다. 하나 잊고 있었다는 걸.
4500일이었다.
100일 단위로 그냥 넘어간 적은 없다. 선물은 없어도 외식이라도 했으니까.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 어제였고 종일 같이 지냈지만 자정을 넘겨서야 알았다. 짐작컨대 이 글을 읽는 대부분에게는 별게 아니다. 멈추지 않고 갱신되는 날짜를 기억하는 일은 어떤 '귀찮음'이 동반되는 과정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 아니 내겐 좀 다르다. 자존심 문제랄까. 내 생일을 지나가지, 이런 걸 지나가면 찜찜하다.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숫자의 상징에 대한 의미부여.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다고, 음... 그리고 며칠 전 준 앞치마로 마음을 대신하면 안 되겠냐고. 아내는 끄덕였다. 괜찮다고 했다. 둘 다 안 챙긴 걸 합의를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안 챙긴 게 더 컸다. 의무는 없다. 어쩌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
첫 번째 여자 친구에서 마지막 아내가 된 여자를 볼 적마다 느낀다.
연예인과 같이 살고 있구나. 동일한 비율로 섞여 있다는 말은 못 하겠다. 그녀의 삶에 내가 동의를 얻고 편입한 게 맞다. 대안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교체 멤버는 계획에 없다. 함께 생의 스위치가 내려가는 그날까지 영영 내 곁에서 머물러 있길, 이것 하나만은 바라고 있다. 고통도 슬픔도, 빼앗거나 신이 조절할 수 있다면 내게 좀 더 많이 가져다 달라고. 하루 종일 바라만 봐도 지루하지 않고 같은 공간 다른 방에 있어도 숨소리와 부스럭거림에 귀 기울인다. 잠잘 적엔 길게 뻗은 팔과 손바닥에 뺨을 비비고, 내가 늦게 들어와 이부자리를 봐줄 적엔 목덜미 깊숙이 안아주거나 등과 다리를 문지르기도 한다. 선과 면, 점과 부피, 양감과 음각, 빛과 그림자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모조리 삼켜 내 안에 각인시킨다. 얼마 전 기고한 패션잡지 칼럼에도 비슷한 표현을 했지만 연애와 결혼이 다른 점이라면, 결혼은 연애시절 동안 한없이 탐닉했던 이미지를 소유하고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고 만지고 말하고, 원하는 만큼 밀착된 거리에서 감각의 균형, 아니 불균형이라도 얼마든지 공유할 수 있다. 동경의 대상과 같이 산다는 것은 경험의 영역이지 표현의 대상은 아니다. 말하지 못한다, 차마 다 적지 못한다. 상상력을 모조리 발휘한다고 해도 그대는 내가 겪는 이 일들을 결코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 미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며, 굶주린 정서에 온기를 불어넣을 만한 완전에 가까운 대상을 연예인이라 칭한다면, 나는 연예인과 살고 있는 게 맞다. 그녀와 눈을 뜨고 창을 열고 밥을 먹고 TV를 보고 음악을 듣고 극장엘 가고 사람들과 만나고 웃고 떠들고 울고 고민한다. 소식과 정보를 나누고 내일과 그 다음 날을 계획한다. 그리고 거리, 우리는 두 사람이라 물리적인 형태를 갖춘 하나의 덩어리가 될 순 없지만, 그 어쩔 수 없는 간극이 더 눈과 발과 생각과 기억을 정지하게 만든다. 완전히 가까워질 수 없어서 완전한 소유를 열망하게 된다. 그 간극이 그녀를 연예인으로 인지하게 한다. 나의, 연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