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언 머피 주연. 피키 블라인더스
전쟁이 죽이지 못한 인간은 남은 생애 주변의 모든 인간을 죽인다. 영국 범죄조직 피키 블라인더스의 두목 토마스 쉘비(킬리언 머피)가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에서 훈장을 세 개나 받은 영웅이었다. 영원히 깨지 못할 전장의 악몽을 겪고 고향 버밍엄에 돌아와 가족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시키고 범죄 사업을 확장한다. 협박부터 살인까지 가리지 않았다. 피키 블라인더스가 접수한 지역에서 이들의 이름은 곧 두려움과 공포였다. 술집에 등장하면 모두가 대화를 멈추고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리를 피했다. 쉘비 집안이 중심인 피키 블라인더스 핵심 조직원들은 스스로를 장군으로 칭했다. 이들의 왕이 토마스 쉘비였다. 4형제와 고모가 주로 조직을 이끌었다. 사업이 커지며 적들도 많아졌다. 죽음은 죽음으로 갚아줬지만 죽은 가족은 돌아오지 않았다. 피키 블라인더스 역시 수많은 남의 가족을 파괴하며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동생, 아내, 고모 등 자신들 역시 여러 장례식을 치른다. 토마스 쉘비는 정치권력과 손을 잡고 스파이 역할을 하며 점점 거물이 되어간다. 그 정점은 토마스 쉘비가 직접 정치인이 되는 일이었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 러시아, 미국, 독일 범죄 조직, 유대인 세력과 공산주의자들 사이를 오가며 토마스 쉘비는 범죄 조직 수장에서 정의로운 일을 하고 싶은 인간으로 새로운 페르소나를 형성한다. 경마 결과 조작, 축구 승부 조작, 술과 마약 유통 등 어느 범죄도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살인은 일상이었다. 토마스 쉘비는 점점 분열되고 있었다. 전쟁 경험에서 비롯된 악몽에 계속 시달리고 (자기로 인해 죽은) 아내의 영혼은 계속 등장하며 맹세했던 가족들은 배신하고 아빠를 기다리던 딸은 결핵에 걸려 사망한다. 토마스 쉘비는 수많은 총격전과 겁박 속에서 살아남았고 해체된 가족을 재결집시키며 모두가 교수형 위기에 처한 사형대에서 상부 설득을 통해 구해내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며 조직도 늙어가고 있었다. 모두 술과 마약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었다. 위기가 닥칠수록 방어 수준은 낮아지고 있었다. 적들의 안구를 생으로 뽑아도 소멸 위협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토마스 쉘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사에 의해 사형 선고를 언도받는다. 시한부라고 그랬다. 토마스 쉘비는 모든 복수를 마치고 멀리 떠난다. 아내와 아이를 잃은 죄책감과 씻겨지지 않는 전쟁 트라우마 속에서 토마스 쉘비는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모든 준비를 마친다. 누구도 감히 토마스 쉘비를 죽일 수 없었다. 오직 토마스 쉘비 자기 자신 밖에. 전쟁에서 이미 수차례 죽음을 겪은 후 돌아온 자가 주변과 세상 모두를 죽여가며 역사를 개편하고 있었다. 목숨을 위협받은 모든 자들의 저주와 그럼에도 그에게 매달린 모든 자들의 절규 속에서 토마스 쉘비는 최후의 죽음마저 저지당한다. 적과 동료를 오가던 알피(톰 하디)와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평생 수많은 다른 가족을 죽였으면서 자기 가족의 죽음에 고통스러워할 자격이 있냐고. 남의 피로 쌓인 명성은 존경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토마스 쉘비는 알고 있었다.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그로 인해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 역시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악몽과 죄책감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발작과 불면, 자녀의 죽음 속에서 토마스 쉘비는 영영 고통받고 있었다. 자처한 형벌과도 같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가 감당해야 할 억겁의 카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