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캠피온 감독. 여인의 초상
여성의 모든 자유가 남성의 선택과 결정에 달려 있는 시공간. 당당하고 자주적이며 아름다운 이자벨(니콜 키드먼)조차 예외는 아니다. 부와 권력, 성품까지 갖춘 남성들이 이자벨을 둘러싸지만 이자벨의 생의 목적은 결혼이 아니다. 이런 이자벨의 가치관을 존중하는 오빠조차 이자벨을 동등한 인간이 아닌 이성으로 흠모하고 연모한다. 이자벨은 자신을 향한 모든 상류층 남성의 제안을 뿌리친다. 주변에선 혀를 찰 일이었다. 여성의 삶의 이유란 그저 남성의 지위를 보조하고 거기에 걸맞은 행실을 유지하는데 헌납해야 하는 시공간이었으니까. 그런 이자벨에게 거액의 유산이 생기고 이를 노리는 사기 세력이 뒤따른다. 이자벨은 뱀의 혀에 굴복당하며 결혼에 동의한다.
결혼 이후 이자벨의 삶은 빛이 소멸한다. 남편 길버트(존 말코비치)는 교도관과 같았다. 이자벨의 모든 움직임과 생각을 결박한다. 남편의 허락 없이는 동네를 벗어나는 일도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자벨을 바라보던 모두가 이자벨의 쇠락을 감지했다. 이자벨은 자신의 불행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길버트는 이자벨에게 오직 복종과 순종만을 요구했다. 길버트는 자신의 딸에게 역시 같은 여성관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이자벨은 영영 산채로 순장된 듯한 삶을 유지할 수 없었다. 마침 오빠의 임종 소식을 듣고 이자벨은 감옥을 벗어나기로 한다. 이런 결정을 스스로 내린 여성이 존재하기 힘든 시공간이었다. 이자벨은 길버트의 딸에게 같이 여기서 벗어날 것을 제안하지만 딸은 더 이상 아빠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며 거부한다. 모두가 이자벨처럼 스스로의 생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탈출과 죽음, 진실, 또 다른 속박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이자벨은 혼란에 빠진다. 온몸을 쥐어짜는 드레스에 갇혀 이자벨은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순박하리만큼 오랜 시간 동안의 기다림을 감내한 이(비고 모텐슨)의 진심 어린 고백 앞에서도 이자벨의 의지와 신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나쁜 남성, 좋은 남성, 그냥 남성 모두가 진절머리 쳐지는 남성들이었고 이자벨의 세계는 저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배하려 드는 절멸과 귀곡성, 폭력과 암흑으로 가득 찬 지옥과도 같았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고 눈과 귀에 닿는 어떤 것도 제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자벨은 화려한 검정 드레스를 휘날리며 도망친다. 불 켜진 저택으로 들어가려 문을 흔든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자벨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었던 시절로. 그때는 어렸고 지금은 상처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