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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하는 괴물,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오펜하이머

by 백승권

이곳이 재미없나? 그럼 장비 챙겨서 여길 나가.

자네 생각을 존중해 주는 곳으로 가라고.


별이 클수록 그 소멸의 과정도 더 격렬해요


당신의 일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들과 멀어지지 마


미래엔 그 무기가

나치보다 더 큰 위협이 될 거야


인류에게 스스로를 파괴할 힘을 준 자


그런 죄를 저질러놓고 이런 일이 생기니까

동정이라도 받고 싶어?


일본 도시에 원폭을 쓰는 건

생명을 구하는 겁니다


3년간 4,000명이 동원됐고 20억 달러를 썼소


오늘 우린 자부심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순교자 행세 제발 그만해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말은 역사를 재구성하는 영화 속에서 늘 입장이 곤란해진다. 영화는 모조리 의도된 각본, 연기, 촬영, 편집을 통해 무수한 가정을 파생한다. 모든 관객들에게 만약.. 그랬다면.. 을 연상하도록 만든다. 이런 반응이 커질수록 역사가 기록한 선택과 판단과 결과는 굳건해진다. 역사의 버전은 늘 하나, 오리지널이니까. 당시의 조작된 기록이 있고 후손들이 모조리 그걸 믿고 있다면 그것 역시 오리지널일 수밖에 없으니까. 오펜하이머는 미국 수뇌부의 지시에 따라 팀과 계획을 짜고 독일보다 앞서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 후 일본은 항복하고 전쟁은 끝난다. 두 가지 사실이 충돌한다. 하나, 오펜하이머가 개발과정을 주도한 원자폭탄이 전쟁을 끝냈다. 둘, 오펜하이머가 개발을 주도한 원자폭탄이 돌이킬 수 없는 살상을 저질렀으며 이후 핵무기 개발 경쟁을 가속화시켜 인류의 종말을 앞당겼다. 오펜하이머는 둘 중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천재, 영웅, 괴물, 구원자, 애국자, 반역자, 공산주의자, 불륜남, 순교자라는 모든 타이틀 중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거머쥔다. 그리고 이 타이틀은 오펜하이머를 사는 내내 묶어 놓는다. 쏟아지는 모든 질문 속에서 오펜하이머는 자주 섬망 증세에 이르곤 했다.


원자폭탄으로 대량살상을 겪어본 적 없는 인류는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가 일으킨 후폭풍 속에서 인간방패를 찾는다. 프로젝트를 이끈 오펜하이머만큼 원죄를 물을 적임자가 없었을 것이다. 전쟁 승리의 영예는 타인들의 몫이었다. 망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이를 알고 있었다. 오펜하이머의 능력이 가져올 가공할 현재와 앞으로 닥칠 미래를 그보다 더 잘 예견할 수 없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과거의 오펜하이머였기 때문에. 승리의 광분이 가라앉고 세계와 후손에 저지른 죄를 물을 때 모두가 오펜하이머 뒤에 숨어 폐와 신경을 찔러대고 있었다. 빨리 네 잘못이라고 해. 네가 전쟁을 일으켰고 네가 폭탄을 만들었고 네가 떨어뜨려서 다 죽였다고 어서 말해. 너만 죽으면 우리 모두 사니까 어서 그렇게 해. 오펜하이머의 아내는 싸움을 거부하는 남편의 끈질긴 태도에 답답함을 감추지 못한다. 개인적인 죄책감과 만인의 누명이 겹쳐 오펜하이머는 스스로 그리고 떠밀려 형장으로 걸어 나온다. 죄를 물었던 자들이 용서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죽은 자들은 말이 없었다. 오펜하이머의 죄책감으로는 그들을 되살릴 수 없었다. 그들에게 오펜하이머는 죄악의 창조주였고 가해세력의 중심이었으며 세기적인 파괴자,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대량학살자일 테니까. 아무도 오펜하이머의 편에 서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도 원하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보였다.


좁은 방 모두가 비좁게 앉은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는 서방세계의 구원자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국가 기밀을 팔아먹은 반역자로 추락하고 있었다. 영웅은 제물이 되었고 과거의 동료는 현재의 원수가 되었으며 오펜하이머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쇠락한 고철로 뒤덮인 불발탄처럼 의자에 앉아 느린 발음으로 답변을 이어가고 있었다. 죄를 창조한 자들에게 무죄를 호소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의 대답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죄인이었고 낙인찍혔으며 그렇게 훼손된 명성은 회복될 수 없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닉네임은 비난의 대상으로 변질되었다. 오펜하이머는 늘 국가와 시대의 도구이자 상징적인 존재로 다뤄지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개인이 선택한 것 중 회자되는 건 공산주의자 여성(플로렌스 퓨)과의 내연 관계, 지인의 아내와의 외도 행각 등이었다. 꾸준한 의지를 가지고 밀어붙인 반핵운동은 반작용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정성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다. 인류에게 이미 스스로 멸망할 수 있는 힘을 쥐어준 과학자는 다른 손에 그 멸망을 늦출 수 있는 브레이크도 같이 쥐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해석하고 판단하기 바빴다. 이건 미치광이 과학자가 혼자 저지른 일이 아닐 텐데. 까마귀들에게 숨 쉬는 내내 간이 뜯길 줄 알았더라도 오펜하이머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리보다 승리가 더 간절했던 시기, 오펜하이머의 폭탄은 이렇게 자기 자신마저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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