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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아빠가 죽으면 아들은 평생 자라지 못하는가

맷 리브스 감독. 더 배트맨

by 백승권


진짜 고아는 어떤지 알아?

방 하나에 서른 명씩 있어.

열두 살에 벌써 고통으로 약쟁이가 되지.

손가락 파먹는 쥐에 비명 지르며 잠에서 깨고

겨울이면 하나씩 죽어가. 엄청 춥거든.



궁핍했던 고아는 부유한 고아를 질시한다. 테러범 리들러(폴 다노)와 배트맨 브루스 웨인(로버트 패터슨)의 관계다. 리들러는 브루스를 향해 부지런히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는 자라서 테러범이 되었는데 브루스는 배트맨이 되었다. 오래전 겪은 결핍의 형태는 유사했지만 배경과 환경이 완전히 달랐고 이걸 극복하는 과정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리들러는 자신의 인생을 태초부터 망친 원흉으로 브루스를 겨냥한다. 정확히는 재벌이자 권력가였던 브루스 웨인의 아빠지만 자신과 차원이 다른 혜택을 고스란히 입은 건 브루스였으니 그럴듯한 명분이었다. 브루스는 브루스 나름대로 아빠 토마스 웨인의 죽음에 대한 상처와 의문에 휩싸여 배트맨 코스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리들러는 친절하게 납치, 폭탄테러, 살인 등등의 강력범죄를 일으키며 배트맨 가면을 쓴 브루스에게 네가 왜 끊임없이 고통받아야 하는지 단서를 흘리고 러브레터를 보내며 관심과 사랑, 공감대 형성을 촉구한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대형 범죄 조직을 연합하며 리드한 테러범 두목에 가까웠다면 더 배트맨의 리들러는 신규 계정을 오픈한 유튜버에 가까웠다. 구독자와 후원금이 대폭 늘고 팔로워들이 리들러의 개과천선을 덧글로 촉구했다면 리들러는 기꺼이 자수 브이로그 영상을 올리며 새로운 영웅 인플루언서 놀이를 즐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담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해피엔딩이라는 옵션이 없는 동네였다.


시종일관 낮은 활력과 긴장, 느린 호흡, 무엇보다도 갑갑함이 강했던 건 크리에이터의 강력한 의도였을 것이다. 원작의 설정과 구도가 분명히 있었겠지만 배트맨은 거의 모든 장면의 존재감이 매거진 화보에서 오려서 붙여놓은 모습 같았다. 영화 초반 사건 현장에서 경찰청장이 조롱했듯 배트맨 코스프레 열성팬의 피로하고 정지한 모습이 내내 보이고 있었다. 고담도 어둡고 브루스의 과거와 현재도 어둡고 리들러의 범죄도 어둡고 온통 어둠뿐이었다. 극적인 불빛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테러범이 열심히 준비한) 도심 곳곳의 폭발조차 연약해 보였다. 수년 전부터 부쩍 심해진 야간운전할 때의 내 시야와도 같아 보였다. 심지어 빛 번짐조차도 사라진 불 꺼진 시골길 같은 어둠. 그리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전혀 알지 못했던, 내가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비밀. 그것도 악당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최악의 과거.


지금은 없는 아빠를 평생 그리워하며 복수를 진행해 온 존재감 최강의 성인 남성이 알고 보니 그 경외와 선망의 도달하기 불가능한 영역의 대상인 아빠가 범죄자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마주했을 때 그리고 그게 진실과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한 판단까지 이르렀을 때, 차라리 균형적 사고가 가능한 인간이었으면 작은 안도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단절의 신호였으니까. 차라리 이쯤 해서 복수고 그리움이고 나발이고 아빠의 아이들, 웨인 가문의 후손 이따위 족쇄에서 벗어나자. 상처받은 영웅 놀이 지긋지긋하다. 배트맨 슈트 입고 언제까지 장난감 병정처럼 슈퍼카 부앙부아앙 몰고 다니며 공동체의 일상 영역을 테마파크로 만들 거야. 이제 좀 그만두고 자유로워지자. 하나 남은 가족, 나의 영원한 어른, 내 영혼의 반려인, 영원한 지원자... 알프레드(앤디 서키스)까지 완전히 떠나기 전에. 어쩌면 유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천성적으로 공익에 헌신할 수밖에 없는 유전자를 타고난 거 아니겠냐고. 이게 다 아빠 때문이다. 또는 아빠의 아빠 때문이거나. 가문의 저주이거나. 배트맨은 늘 악당들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의 퍼즐을 완성해 가는 캐릭터였다. 상호보완적 관계. 악당이 없었다면 배트맨을 찾는 라이트가 밤하늘을 밝힐 일도 배트맨이 한밤 중에 출동할 일도 굳이 총을 안 쓰고 육탄전으로 적을 하나하나 힘겹게 깨부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악당들에 의해 존재의 명분을 가져가는 인물, 배트맨은 내심 리들러가 고마웠을 것이다. 늘 손 편지를 써주고 자신을 찾아주는 악당이.


더 배트맨은 지금껏 봤던 모든 배트맨 영화 중 가장 미성숙한 행태의 배트맨을 보여준다. 항상 수동적이고 타자 의존적이며 갈등과 결단의 과정이 매끄럽지 않고 해결이 불분명하며 착하고 정의로운 경찰 없이는 늘 곤경에 처하게 되고 몸싸움은 언제든 중화기 공격에 취약해 보였으며 중저음의 대화는 늘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머물러 있었다. 브루스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서 어떤 외형적 싸움이라도 벌여야 했지만 그조차 나중에는 과거와 내면으로 귀결되어 흐지부지 되고 있었다. 자라지 못한 성인 남성, 브루스 웨인은 아이였다. 가면과 망토를 걸치고 장난감을 몰고 다니며 동네 대장을 자처하는 아이. 그의 정의감은 거대 도시가 아닌 자아를 방어하기 급급해 보였다. 영화는 계속될 것이다. 배트맨은 상처받은 자경단이라는 스스로의 이미지에 늘 취해 있고 지속시킬만한 재정 능력과 시간이 충분하니까. 죽어서도 넘지 못할 것 같은 지하 절벽을 기어이 기어오르던 이전 영화의 두 명이 떠오른다. 그들은 적어도 목적과 결단이 명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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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