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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r 06. 2024

상처받은 싱글과 안 팔리는 책에 대하여, 싱글 인 서울

박범수 감독. 싱글 인 서울

 상처는 숨기고 싶은데 작가는 되고 싶다?


2018년에 신춘문예 단편 소설에 당선되었다. 2007년부터 회사에서 광고 카피를 썼다. 그전부터 영화 리뷰를 썼다. 그전에는 아마 일기장에 동시를 써서 숙제로 제출하기도 하고 독후감도 쓰고 학교 대표로 백일장 대회에 나가 상도 몇 번 탔을 것이다. 이름이 불리면 교실 책상에서 일어나 책을 읽어야 했던 나이 때부터 글을 써왔다. 새로 산 공책이든 아이패드 메모앱이든 호텔 침대 위에 놓인 안내문의 뒷면이든 패션 매거진 화보의 한쪽 구석 여백이든 다양한 형태의 글을 써왔다. 글이라고 부르는 각자의 기준과 경계가 있을 것이고 그런 기준의 주변부와 경계를 관통하며 글을 써왔다. 어떤 글은 월급이 되어 쌀과 바꿨고 어떤 글은 이직할 때 경력 증명서가 되었고 어떤 글은 지인 결혼식을 위한 청첩장, 어떤 글은 가까운 이들과 나누는 성탄절 카드가 되었다. 임수정, 이동욱 주연의 영화 싱글 인 서울에 등장하는 글은 에세이다. 싱글이 쓰는 에세이. 주로 서울 사는 싱글들을 주요 독자로 정한 에세이, 잘생기고 유능하고 부유하고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며 외로움과 허세를 사진과 독백으로 드러내는 남성 강사가 쓰는 에세이. 에세이가 작가의 일상에서 온다면 에세이의 흥행 여부는 독자가 얼마나 읽고 싶은 작가의 일상이냐는 점일 것이다. 일상이 아니라 작가가 누구냐가 더 중요하다. 일상은 다들 알고 매일 하고 있으니까. 다들 알고 매일 하고 있는 걸 특별한 사람도 비슷하게 하니까 궁금해진다. 나처럼 보잘것없고 평범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하는 생각과 고민과 일상을 저토록 찬란하고 뛰어나고 특별한 사람도 하고 있었구나. 글로  읽으니 남다른 이미지가 보이는구나. 나와 비슷한 면이 있어서 위안이 되는구나. 그럼에도 나와 완전히 다른 지위를 갖추고 있어서 같은 일상인데 나는 뭐지 하는 씁쓸함도 겹치는구나. 주체가 특별하면 같은 일상, 장소, 대화도 특별해 보인다. 물론 이런 관점과 해석은 편협하다. 세분화한다면 에세이로 옮겨지는 일상은 작가의 수만큼 다채로울 테니까.


사실 흥행하는 에세이에 대해

내가 제대로 알리가 없다.


알았다고 해도 필력이 없거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어떤 형태로든 출간된 에세이 중 베스트셀러가 없기 때문이다. 안구부터 영혼까지 재물과 권력을 모두 가진 듯한 이동욱이 에세이 작가로 등장하는 이야기에 대해 샘내려는 게 아니다. (맞나) 저런 매끄러운 과정이 부러웠다. 마치 그저 숨 쉬고 눈뜨고 밥 먹으며 존재했을 뿐인데 성실한 출판사 편집자가 하필 최측근과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라서 연결되고 미팅을 하고 주제를 선정하고 원고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부러웠다. 작가가 고집하면 출간을 취소할 수 있구나. 세상에. 출판사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작가라니. 출판사의 요구는 신의 아들 같은 개념 아니었나. 인류의 다수가 섬기지만 아무도 경험한 적 없다는. 심지어 그의 첫사랑마저 작가라서 같은 미팅룸에서 마주하게 된다. 와. 대박. 역시 되는 사람은 다 되는구나. 외모도 되고 스타일도 되고 능력도 되고 출간 과정까지 다 되는구나. 부럽다는 말을 계속 쓰니까 신빙성이 낮아 보이는 데 아무튼 부러웠다. 이사 갈 집도 잘 고르고. 영화 제작진의 취향이 보이는 장면들이 많았다. 아저씨스러운 취향을 굳이 감추지 않는구나 싶었다. 세상엔 유니콘 같지만 (어쩔 수 없이) 아저씨인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구나. 동시대적 감각을 노출한다는 게 이만큼 어렵다는 게 감지되는 부분이었다. 아직도 커피, 와인, LP로 대화를 끌어내는 장면이 나오다니. 건축학개론의 2010년 버전 정도로 납득한다면 아무래도 괜찮았다. 논술 강사에서 에세이 작가를 지나 소설가로 이어지는 커리어보다 덜 작위적이었으니까. 타인의 삶이 무조건 내 기준에 맞춰 매끄러울 수는 없다. 아무도 스트레스받지 않는 직장과 막힘 없이 써지는 글과 아이맥스 같은 해상도의 야경이 늘 빛나는 집과 하루종일 서점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괜찮은 삶으로 가득하더라도. '상처받은' 이야기가 워낙 팔리는 시대이다 보니 어떤 극적인 '상처'를 은연중에 기대한 것 같다. 굳이 누군가 피를 보거나 향을 피우거나 사고를 당할 필요는 없겠지. 주인공들이 심하게 다치지 않는 영화도 필요하다. 어떤 장면에서는 이소라의 가사가 떠올랐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가 나와서 반가웠다. 시를 읽는 장면은... 의도된듯한 유치함의 목적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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