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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r 05. 2024

빼앗길 수 없는 이름, 로기완에 대하여

김희진 감독. 로기완

로기완은 북한인이다. 탈북 후 중국에서 숨어 살다 어머니를 잃는다. 어머니는 로기완의 피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로기완의 모든 피가 빠져나가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어머니 시신을 팔았다는 돈을 품고서. 로기완은 우여곡절 끝에 벨기에에 도착한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야 했다. 먹고 자고 입고 죽을 곳도 없었다. 뭐가 좀 있어야 살아남는 시늉이라도 할 텐데 썩은 음식을 먹고 토하고 유료 화장실에서 숨어서 자고 양아치들에게 맞다가 온몸이 물에 빠져 젖고 덜덜 떨다가 어머니 피에 젖은 지갑을 도둑맞는다. 로기완(송중기)은 도둑을 쫓는다. 그리고 타협한다. 돌려받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도둑 역시 어머니가 없었다. 어머니가 없는 타국에서 둘은 결핍이란 교집합으로 서로의 뺨을 감싼다. 마리(최성은)가 마약 주사를 팔에 꼽을 때 로기완은 이를 말리기 위해 마약 가루를 한 움큼 목구멍에 털어 넣는다. 이런 파괴적인 관계가 얼마나 갈까. 무엇보다 로기완의 목숨은 자기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김성령)가 자기 목숨을 내어주며 남긴 유산이었다. 생사결정권이 없었다. 생존은 선택이 아니라 단 하나의 과녁이었다. 마리는 로기완과 달랐다. 마리는 증오하는 아버지(조한철)가 있었고 증오하는 자신이 있었으며 증오하는 깡패가 있었고 이 모두를 쏘고 싶은 총도 있었다. 마리는 망가질 여유가 있었다. 로기완의 등장은 기이한 변수였다. 마리가 도심 한가운데서 망가질 자유를 만끽하는 동안 로기완은 공장에서 죽은 돼지를 토막 내가며 난민 심사를 위해 심장을 졸여야 했다. 조선족 선주(이상희)는 이런 로기완에게 따뜻한 음식을 주고 위기에서 구해준다. 선주는 중국에 떼어놓고 온 자식 수술비를 위해 억척스럽게 버텨야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로기완을 배신해야 했다. 로기완의 손에서 핏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칼날을 쥐며 생살이 갈라지는 날들 속에서 로기완은 혼자가 아닌 다수의 도움으로 도망친 땅에서 죽지 않아야 했다. 다친 사람들끼리 뭉쳐서 서로를 다시 다치게 하는 차갑고 날카로운 시간 속에서 로기완은 오직 어머니가 남겨준 몸뚱이만 생각하며 죽을 수 없는 삶을 꾸역꾸역 이어가야 했다. 영화 로기완은 한 여성의 품에서 벗어나 동무 여성의 배려를 거쳐 다른 여성의 품에 안기는 도망자의 삶과 여정을 그린다. 고생만 하다 죽는 숱한 운명들 사이에서 인연과 우연, 운의 작용과 반작용으로 끝내 자신만의 다음 행선지를 정하게 되는 인간의 자립을 보여준다. 공존 없이는 불가능한 자립. 양아치들도 피해자 짓밟을 때 떼로 몰려드는데 아무것도 없는 로기완 혼자서는 제대로 죽기도 어려운 삶이었다. 도와 달라고 해야 했다. 제발, 계속, 나를 그냥 두지 말고 살려 달라고. 제발 우리 어머니가 목숨 바쳐 피 묻혀 가며 쥐어준 이 한목숨 부지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지켜낸 이름이었다. 로기완은 언제까지나 어느 곳에서도 로기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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