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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하는 이야기

by 백승권

이런 내용을 전달하는 건 아마 처음일 겁니다. 어떤 날은 내가 모든 순위에서 뒤로 밀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원인은 짐작할 수 있죠. 수면 부족, 피로 누적 또는 해결되지 않은 스트레스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있다가 금세 넘치죠. 넘치면 심연을 덮어요. 이해, 판단, 인내 등 정신의 균형을 무너뜨려요. 아무리 숨기려 해도 몸이 기울고 눈앞이 흐려지고 귀가 너무 예민해져요. 극소수가 겪고 있는 청각이 심하게 예민해지는 증상에 대한 전문 용어도 있다고 하던데. 저도 그런 것 같아요. 그 증상을 일상에서 자주 겪고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더욱 심해지고 더욱 심해지면 몸과 마음이 더 피곤해지죠. 악순환이에요. 절대 부러지지 않을 아주 단단한 물체로 귀를 때리는 것 같아요. 실제로 머릿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느낍니다. 표정이 밝아질 수 없죠. 이게 지속되면 언어 체계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나오는 말과 손 끝으로 옮겨지는 글이 거칠고 어두워져요.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죠. 예민해서 그래. 맞아요. 맞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런 말들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공격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쟤는 남들보다 심하게 예민할 때가 있어서 너무 힘들고 짜증 나고 이해하지 못하겠어. 이렇게 생각을 하겠구나라고 짐작이 되기도 하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집니다. 주변의 분위기에 유해하지 않은 상태로 돌아오게 되죠. 그리고 '예민하게' 보였을 때 했던 말과 글들에 대한 사과를 해요. 진심일 때도 있고 에티켓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 하려고 합니다.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가끔 이것조차 어려울 때도 있어요. 미안하다는 말조차 너무 지겹구나라고 여겨질 때가 있죠. 기본적인 매너조차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어요. 이럴 때는 정말 심각할 때죠. 결국 스스로 정한 인간다움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아직까지는 다행이죠. 겨우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을 자제력이 남아 있어서요. 멀거나 가까운 곳에 더 힘들었을 것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도 해요. 과거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겪은 고난이나 또는 실제 인물이 겪었던 시련들, 또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겪었던 폭력까지 기억해 내며 비교하기도 해요. 아이고 그래도 내가 낫지... 이런 간편한 결론을 내리려는 게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잠시 떠올려요. 그들의 고통을 상상하고 비슷하게 느낄 수 있을지 가늠해보기도 해요. 이걸 상대적 위안이나 위로 같은 행위로 표현하고 싶진 않아요. 이런 시도로 내 내면의 밝기가 확연히 올라가는 게 아니니까요. 다른 시공간에서 있었을 거대한 그리고 수많은 유사 죽음들에 대해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제 현재의 고난이 정당해지는 건 아니죠. 해소되는 건 없어요. 다만 잠시 멈춰서 타인들의 상황에 대해 떠올리는 거죠. 요즘은 좀 자주 그렇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임계점이 오기도 했나 봐요. 이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맥락을 누구와 이야기하겠어요. 여기 적은 것들도 전부가 아닌데. 글에도 담기 힘든 진심과 진실이 많아져요. 누군가는 다칠 테니까. 아마 제가 가장 많이 다칠 겁니다. 허상과 비밀 사이에서 표현과 침묵을 가르기 어려워져요. 어떤 자아가 나머지 자아를 누르고 있는지 잘 모를 때가 요즘 많습니다. 충동적 슬픔과 간헐적 긍정, 통제 불가의 상황들이 연쇄 추돌하고 있어요. 매일 피를 흘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숨죽여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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