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적응하려 애쓰다 보면 결국 그래서 나는 어떤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다다릅니다. 주체이자 시작점에 대한 정의가 분명해야 파장과 연결에 대한 예측과 대응도 가능하다는 계산일 수 있죠. 수십 년 동안 몸집과 생각의 부피가 늘어나는 동안 그 어떤 외부적 요소의 개입 없이 아니 있더라도 결국은 스스로 수습하고 편집하고 다듬고 개선하고 수정한 대상이 결국 주체이자 시작점의 원본이자 총책임자가 나라고 여기면 내가 가장 잘 알 텐데. 그래서 내가 나를 잘 알고 설명 묘사 증명할 수 있느냐. 모르겠죠. 누적된 직간접적 빅데이터를 모아서 아무리 일목요연하게 보고서를 산출하려고 해도 그래서 내가 누구냐에 대해서 심플한 결론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이러니... 나와 연결된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완벽함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최소한의 설득력을 갖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이건 세상 모두가 떠드는 자신감, 자존감에 대한 심리적 태도적인 부분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결국 관계라는 건 관계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 해석, 프레임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질 텐데. (스스로가 갖춘) 렌즈의 종류와 컬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면서 저런 2차적 과정과 결론이 제대로 도달할 수 있느냐는 거죠. 진지하죠. 요즘 진지해진 않으려 노력 중인데 이게 사고의 선명도와 정확도를 맞추려면 이런 과정이 가볍게 지나칠 수 없더라고요. 조금 시간이 걸려도 이 과정을 제대로 짚고 넘어갈 수 있다면 다음 단계에 대한 수고로움도 덜어낼 수 있거든요. 결국 디테일까지 잘 살아있는 가장 원하는 해상도의 이미지를 얻을 가능성도 조금 더 커질 수 있죠. 그래서 관계에 좀 더 다가가기 전에 나에 대한 규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단순하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는 걸 점점 깨닫고 있어요. 복잡하더라도 복잡한 대로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가볍고 심플한 마인드 같은 걸로 즐겁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려는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닌데 그걸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언제부턴가 깨달았죠. 저런 삶도 있을 텐데 여전히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로 상대와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의 한계가 관계의 한계가 되겠죠. 관계는 작용과 반작용일까요. 앞으로 쏘아 올린 화살이 행성을 한 바퀴 돌고 뒤로 날아오는 시간일까요. 종이컵과 실로 연결된 전화기일까요. 눈보라 속에서 잠시 같이 둘렀던 목도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