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조끼

by 백승권

아까는 걷다가 문득


희망의 필요조건이

절망이라는 것만큼

더 절망적인 절망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희망이 절망의 파도 속에서

가라앉지 말아야 할 종이배라니


희망이 절망의 폭격 속에서

끝까지 지켜져야 할 오두막이라니


희망이 절망의 회오리 속에서

휩쓸리지 말아야 할 비닐하우스라니


희망과 절망이 태어날 때부터

신체 일부가 밀착된 샴쌍둥이라니


희망과 절망이 할인할 때 산

나이키 스니커즈 한쌍이라니


희망과 절망이 어느 날 갑자기

한쪽을 잃어버리고 마는 에어팟라니


한쌍, 균형이 대체 뭐길래


한 발을 딛고 넘어지기 전에

다른 한 발을 마저 딛는 것(?)


나만 웃긴 농담을 던지고

어색해서 먼저 웃는 것(?)


언젠가 올지 안 올지 모를 좋은 날을 위해

영영 안 끝날 것 같은 나쁜 날을 견디는 것(?)


희망은 구명조끼일 수밖에 없잖아요

익사 위험이 도사리지 않으면 입을 필요 없고

이미 입고 있다면 익사 공포를 다소 극복할 수 있는


하지만 수영 못하는 사람들은 구명조끼 없이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물에 들어갔을 때

섬뜩한 억겁의 공포를 실감하게 되니까 찾는 거죠.

희망이라는 번거롭지만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필수장비를


대부분은 제때 구매하지 못하고

시즌 놓치고 때 놓치고

절망의 방어 타이밍을 놓치죠

이걸 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기준이 없고

구매 이력이 별로 없으니 매번 망설이고

막상 구매하려 하면 가성비 따지게 되고

어디서 구매하고 어떻게 구매하는지

알 것 같지만 흥정으로만 치루기엔

너무 비싸니까


희망은 비싸요

나는 잔고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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