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지

by 백승권

당신이 나를

불쌍히 여길 때까지 좋아할 거예요

나 혼자 이렇게 오랫동안

모든 순간의 끝까지 끈질기게 좋아했어도

끝내 가질 수 없고 도달할 수 없었던 나를

불쌍히 여길 때까지


난 가능해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이미 그러고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있어요


당신께 절실히 호소하려는 게 아니에요

우연히라도 누군가 눈치채게 하려는 게 아니에요

정말 이제는 제가 가여워서 그래요

저는 제가 너무 불쌍해요.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내가


도와줄 사람이 나 밖에 없고

들어줄 사람이 나 밖에 없고

멈추게 할 사람이 나 밖에 없는 내가

이토록 너무 초라해서 미칠 것 같고

한없이 부끄럽고 누추하고 당장이라도

나를 누군가 끝내버렸으면 해서

그게 나밖에 없어서 처음부터 그랬어서

당신이 아닌 내게, 내게 호소하는 거예요

불쌍한 너를 내가 끝내주겠다고

이토록 입을 틀어막고 울부짖는 너를

놔둘 수 없다고 말리고 싶다고

그래서 여기까지 그만 멈추려 합니다


내가 멈춰도 아무것도 멈출 리 없는 거 잘 알아요

그저 나만 멈춰도 모든 것은

아무렇지 않게 움직인다는 거

그걸 오래전에 아니 처음부터 알았어요

당신이 그 자리에 있어도 내가 더

가까이하지 못했던 것처럼

내가 이 자리에 없어도

세상 어느 것도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게 확신에 이르러서 저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더 먼 곳을 바라보기로 합니다


희망은 거기로 간 것 같아서

먼저 도착하면 내가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길 것 같아서

현실을 딛고 제대로 서 있지 못했던 나를

더 다가오지 못할 정도로 망설이고

더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나약했던 나를


그러니 마음껏 이제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당신이 나를 불쌍히 여길 정도로

당신을 좋아했던 사람이 한때 있었다는 걸

영원이란 개념이 허구와 망상에 불과하더라도

영원을 흉내내기 위해 앞으로도 내내

영원을 실패하고 실험하며 좋아할 거라는 걸

잠시라도 알아주세요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일찍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만나고 헤어져도 처음 만난 기억으로

다시 만나고 다시 같이 있고 싶어서


덕분에 행복할 수 있어서

그만큼 불행할 수 있었고


전 이만 살아갈 테니까

당신은 나를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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