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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Nov 16. 2019

채식주의자, 저항의 거식증

한강 장편소설. 채식주의자

꿈을 꾼다. 이후 영혜는 육식을 거부한다. 미량의 육류도 체내에 들어오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야위어 간다. 멈추지 않는다.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은 걱정한다. 아빠는 뺨을 휘갈긴다. 가족이 총동원되어 영혜를 붙잡고 입을 벌려 탕수육을 쑤셔 넣는다. 영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칼로 손목을 긋는다. 영혜는 이혼한다. 영혜는 혼자 산다. 여전히 육식을 거부하며.


피에 젖은 영혜를 업고 간 남자는 영혜 언니의 남편이었다. 아티스트. 아티스트는 그날 이후 영혜의 강렬한 이미지에 끌린다. 영상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한다. 알몸에 색칠한 남녀가 섹스하는 영상을 구상한다. 아티스트는 혼자 사는 영혜를 찾아간다. 제안한다. 알몸 색칠을 찍을 거라고. 후배도 데려와 칠한다. 둘 다에게 섹스는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다. 촬영 현장이 달아오르고 제안한다. 후배는 거부하고 현장을 떠난다. 이후 아티스트는 자신을 남자 모델로 대체하고 영혜에게 제안한다. 제안은 실현된다. 강압은 없었지만. 영혜 언니가 찾아온다. 남편의 영상을 본다. 색칠한 알몸 남편과 색칠한 알몸 여동생이 뒤엉켜 있는 작품. 영혜 언니는 엠뷸런스를 불러 영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남편과 단절한다.


비 오는 날 영혜가 사라진다. 인근 숲에서 발견된다. 영혜는 여전히 육식을 거부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음식 섭취를 거부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미음을 식도로 강제로 넘기려 시도한다. 영혜는 거부한다. 피를 토한다. 위산이 텅 빈 위를 녹이고 있었다. 핏물로 뒤덮인 육식에 대한 꿈은 신체가 식물로 변화는 환상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언니는 알 수 있었다. 영혜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있음을. 영혜는 아무렇지 않았다. 끝이 오고 있었다. 이미 왔거나.


영혜는 조용한 캐릭터다. 표현과 주장이 적다. 남성 중심사회에서 영혜는 남편과 아빠에게 순응적인 여자다. 뭘 요구해도 받아주고 말없이 따르는. 육식 거부는 영혜 인생 최초의 사건이었다. 육식 거부를 통해 영혜는 다른 사람으로 각인된다. 다른 포유류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게 인간 문명에서는 생존 거부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육식 거부와 함께 영혜의 존재도 사라지고 있었다. 영혜 인생 최초의 자기주장은 사형 선고가 되었다. 주변에 공격한 자들과 떠난 자들과 착취한 자들은 모두 남자였다. 영혜는 여자였다.


딸의 뺨을 휘갈기며 억지로 육류를 입에 쑤셔 넣는 아빠, 아내가 변하자 떠나는 남편, 영혜를 자신의 성욕과 커리어를 위한 도구로 쓰는 영혜 언니의 남편, 그들 모두 육식을 옹호하는 자들이었다. 영혜는 그들 인생의 소비재와도 같았다. 쓰다 버리는 대체 가능한 사물. 영혜는 단지 육식만 거부했고 식물이 되고자 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로 자신의 모든 근본이 바뀌길 원했다. 그렇게 육식으로 연명이 가능한 인간으로서의 모든 삶을 내려놓는다. 결과와 반응은 극단적이었고 영혜는 모든 변화에 초연했다. 영혜만 초연했다.


원시 인류는 힘과 체격을 갖추어 사냥에 유리했던 남자 구성원을 통해 육류를 섭취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여자 구성원도 사냥 등의 행위에서 완전히 배제된 건 아니겠지만. 이런 주장을 전제로 둔다면, 영혜의 선택은 남성으로부터 제공받는 모든 서비스의 거부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으로 남성으로부터 이뤄진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 그것이 죽음에 이를지라도 철저히 완전히 거부하는 것. 채식주의자라고 불리던 거식증이라고 불리던 순응적인 자신의 삶을 가장 능동적인 죽음을 향한 고요하고 고집스러운 질주로 바꾸는 것. 불꽃처럼 느껴졌다. 고기를 익히는 걸 돕다가 세상의 모든 육류를 완전히 태워버릴 불꽃. 작지만 맹렬한 점화의 시작. 82년생 김지영 이전에 채식주의자 영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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