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년, 지금의 나를 만든 3가지 에피소드

슈언니 story 1. 나를 찾는 탐색의 시작

by 말거는 슈언니

1학년. 도덕 시간에 평생 잊지 못할 상을 받았다. 별명이 ‘꿈쌤’인 박영하 도덕 선생님은 그냥 교과서 위주의 수업을 하지 않으셨다. 칭찬 노트 쓰기, 학교 뒷산에서 나무 끌어안고 느껴보기, 유언장 쓰기 등 고1인 우리가 감각을 활짝 열고 받아들일 기회,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선생님만의 독특한 시상식도 있었다. 한 학기에 두 학생에게 각각 촛불상, 소금상을 주셨는데 특이해서 받고 싶다고 생각했던 소금상을 2학기 끝날 때쯤 진짜 받게 되었다. 이 상을 내가 받게 되었단 사실보다 더 놀라웠던 건 소금상의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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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반에서 함께 동고동락한 급우들에게 감동과 웃음을 주었고 장차 이 나라를 더욱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 사람이라고 여겨’ 이 상장과 상품을 드립니다. 아니, 내가 장차 이 나라를 더욱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 사람이라니. 존경하는 쌤이 나를 이런 사람이라 여기시다니. 나 자신을 향한 기대감과 믿음의 씨앗이 내 안에 뿌려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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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나의 가장 커다란 꿈은 ‘진짜 행복한 대한민국 만들기’가 되었다. 불가능할 것 같은 꿈이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또 가능한 일이다. 대한민국 전체를 행복하게 만드는 건 어렵지만 대한민국 국민인 나 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내가 행복하면 내 주위 사람들에게 행복 바이러스가 퍼져나갈 것이고 그 사람들의 주위 사람들에게도 퍼져나갈 것이다. 그렇게 점점 퍼져나가다 보면 진짜 행복한 대한민국 만들기라는 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만의 논리.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앙드레 말로의 말을 좋아한다. Keep g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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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뮤지컬 티켓 있는데 볼래?”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에게 온 연락. 학생 서포터즈였던 그 친구 덕분에 난생처음 뮤지컬이라는 걸 보게 되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배우들의 춤과 노래 연기를 보며 흠뻑 빠져들었고 세상 가장 환한 표정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이때부터 내 꿈은 진지하게 뮤지컬 배우가 되었다. 지금 내 상황에서 당장 꿈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 친구처럼 학생 서포터즈가 되는 거라 생각했고 2기 모집에 지원했다. 감사하게도 학생 서포터즈 회장이 되어 무대와 배우들의 연습 현장을 자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화려한 무대 뒤에 이런 노력의 과정들이 있다는 걸 눈으로 보며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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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배우의 기본은 노래, 춤 연기. 노래 부르고 춤추는 건 초딩 때부터 좋아했고 끼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연기는 어쩐다. 배워봐야 진짜 내건 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엄마를 졸라 고3 여름방학 두 달 동안 연극영화입시학원에 다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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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 기는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발연기하는 나를 보며 ‘아 쪽팔려. 역시 난 안돼’라는 생각은커녕 ‘이제 막 배우기 시작했는데 잘할 리가 있나. 그런데 뭔가 있어. 나랑 잘 맞을 것 같아.’라는 직감이 들었고 그때 그 직감은 정확했다. 스무 살 입사 후에도 꿈을 향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지금까지 무대에 오르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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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희수야 니가 나가보면 좋겠다" 담임쌤은 반에서 가장 활발한 나를 지목하셨다. 나의 주장 발표 대회였다. 내키진 않았지만 한 반에 한 사람씩은 나가야 한다니 나가기로 했다. 주제는 ‘금연’. 학년별 예선에서 3명씩 뽑아 총 9명이 체육관에서 본선 무대에 선다. 발표 원고를 준비하면서 그냥 발표하면 다른 애들이랑 내용도 비슷하고 재미없을 것 같아 엄마에게 검정 보자기 하나만 구해달라 부탁했다. 그걸 망토처럼 두르고 “이 세상의 흡연은 가라!” 하면서 개콘 패러디로 시작했는데, 예선에 붙어버렸다. 반 친구들이 축하를 해주니 본선에서 또 잘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드디어 본선 날, 3학년이라 거의 끝 순서였고 아니나 다를까 내 순서엔 많은 학생이 신나게 눈을 감은 채 헤드뱅잉 중이었다. 그래도 앞에 나와 발표하는데 청중이 듣지 않으면 의미가 없단 생각에 단상을 내리치며 “이 세상의 흡연은 가라!” 첫 문장을 내질렀다. 잠이 깨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니 세상 뿌듯했다. 무사히 발표를 마친 후 검은 망토를 휘두르며 단상을 내려왔다.





그렇게 모든 발표가 끝난 후 바로 시상식이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이 불리고 박수 소리가 연이어 터지는 와중에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아 ‘이 학교는 꽉 막힌 학교야. 개콘 따라 했다고 상을 안 주다니.’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살짝 삐지려 하는데 마지막 금상에 내 이름이 불리는 게 아닌가. ‘내가 틀렸어. 이 학교는 참 열린 학교야.’라고 마음을 바꾸며 신나게 걸어 나갔다. 조금은 남다른 시도로 전교 1등(공부는 아니지만)을 했던 이 경험으로 내 안에 또 다른 씨앗 하나가 뿌려졌다. 다른 사람들보다 ‘잘해서’ 1등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1등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누군가의 뒤를 그대로 쫓기보단 나만의 샛길로 빠져보는 경험.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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