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정녕 실화란 말인가? <요가와 함께 하는 글쓰기 명상수업>은 너무나 간절해서 오히려 차마 입 밖에 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머나먼 꿈 속의 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꿈이 다니던 요가원에서, 불과 3개월 뒤에 현실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아닌가?
“다른 준비는 이미 충분하신 것 같으니, 요가 티칭만 열심히 연습하시면 되겠어요.”
원장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요가원을 나섰지만,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열심히 연습해야할 것이 요가 티칭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디를 보고 ‘다른 준비가 이미 충분하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믿고 맡겨주신 원장님께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수업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셀프 특훈 모드로 한 달 반이 흐르는 동안 세부 강의안이 나오고 드디어 지난 주 첫 번째 리허설이 있었다.
“준비 많이 하셨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직접 해보니까 어떠세요?”
“너무 긴장을 해서 제가 뭘 했는지를 모르겠어요.”
“평소엔 나랑 편하게 얘기하잖아요. 지금도 똑같은 상황인데 왜 긴장이 될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원장님, 이런 상태로 제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이 수업의 주제가 ‘자기돌봄’이죠? 선생님에게 ‘자기돌봄’은 뭐예요?”
“‘멈춤’이요. 제가 뭐 하나에 꽂히면 정신을 못 차리는 스타일이거든요. 몸이 지쳐 쓰러져 있는 동안에도 머리의 모터는 저를 사로잡은 그 것에 주파수를 맞추고 쉼 없이 돌아가요. 머리에서 정말로 모터 타는 냄새가 느껴질 만큼. 너무 힘들어 제발 멈추고 싶은데도 도무지 멈춰지지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요가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신기하게도 머릿속 모터가 고요해지더라구요.
그 ‘멈춤’만으로도 깊이 충전되는 느낌을 받아요. 비로소 숨이 쉬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아사나를 통해 회복되는 몸의 에너지까지 더해지면 충만감은 더 깊어지죠. 그렇게 쉬고 나면 상황과 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겨요. 더 건강한 몰입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 거죠. 그러니까 요가는 제게 ‘자기돌봄’의 의식인 셈이네요.”
이건, 뭐지? 한 번도 정리해본 적 없는 이야기가 술술 잘도 흘러 나왔다.
“바로 그거예요. 지금처럼 그냥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해주면 돼요. 그게 책에서 찾은 멋진 이야기들보다 훨씬 좋아요. 대본 외우느라 고생 안 해도 되고요. 내가 이미 준비가 충분하다고 한 건 필요한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는 경험치가 충분하다는 말이에요. 제가 볼 땐 지금 선생님께 부족한 건 딱 하나,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인 것 같은데요.”
그날 내게 그녀의 목소리는 맑은 소리와 풍부한 진동으로 명상의 시작을 알리는 싱잉볼 소리처럼 느껴졌다. 외부의 소리에 휘둘려 다니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라니, 그것은 말 그대로 ‘명상’이 아니던가. ‘귀 기울인다’는 것은 ‘존중’의 표현이다. ‘스스로에게 귀 기울인다’는 것은 ‘스스로를 존중한다’는 의미다. 존중은 사랑의 기반이다. 그렇다면 ‘명상 프렉티스’란 스스로를 사랑하는 연습에 다름이 아니지 않은가?
남의 이야기를 짜깁기한 대본으로는 살아있는 수업을 할 수 없다. 좋은 수업을 하고 싶다면 남은 선택지는 진짜 나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 뿐. 솔직히 아직은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감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첫 번째 실습을 통해서 남은 시간 해야할 일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까봐 두려워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고 있는 내 안의 아이가 오랫동안 조린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도록 안전한 울림의 공간이 되어주는 것, 이것이 1.31까지 남은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준비가 아닐까?
스승이 자신의 경험에서 울리는 소리와 진동으로 나를 깨웠듯 나를 통과해간 울림만이 나만큼 간절한 그의 가슴에 공명을 일으킬 수 있게 될테니까. 이젠 정말 나를 위해, 그리고 소중한 이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멈추어 귀 기울이는 순간들을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