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왔다. 요가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제대로 내긴 했나보다. 친한 지인이 대뜸 물었다.
“근데 요가가 뭐야?”
“그니까...그게...아마도...인도말로 그게 ‘합일’인가 ‘연결’인가 하는 뜻이라고는 하는데...”
요가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설명은 딱 거기까지였다.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지난 글에서 내게 요가는 새로운 사랑을 가르쳐준 스승이자 연인같은 존재라고 했다. 세상에나! 아무리 그저 함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지만, 5년간이나 그렇게 붙어 다녔던 애인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이름의 뜻 뿐이라니.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게다가 요가 강사로 살겠다고 선언한 이상 이 질문을 피해갈 도리가 없지 않은가.
집에 돌아와 책꽃이에 꽂혀있는 요가책들을 모두 꺼내 들었다. 그리고 ‘요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어째, 읽으면 읽을수록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인생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그러다가 다음 문장을 만나고야 조금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잘 깍인 다이아몬드가 많은 면을 갖고 각각의 면에서 상이한 빛과 색을 내듯이, ‘요가’라고 하는 말도 이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면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마음의 평온과 행복’을 얻고자 정진하는 모든 영역에 걸쳐 다양한 면을 보여 주고 있다.
B.K.S. 아헹가의 <요가 디피카>중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각각의 면, 모든 영역에 걸친 다양한 면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이 모두 ‘마음의 평온과 행복’에 관련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일단 갖고 있는 책에 언급된 요가의 정의들을 수집해서 범주별로 분류해 보았다. 그 결과, 요가를 설명하는 표현들이 특정한 ‘경지’에 이른 상태(stage),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정리된 지식 및 훈련체계(system),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한 실제적인 활동(practice)이라는 세 범주에 대부분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요가에서 말하는 그 ‘경지’란 어떤 상태일까? 내가 참고한 책들은 그 ‘경지’를 설명하기 위해 주로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 기타’라는 힌두교의 경전들을 인용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우주정신과의 영적 교감을 이룬 상태’, ‘세속의 성공과 실패에 초연한 상태’, 다시 말해 ‘고통과 비애’로부터 해방된 상태라는 표현들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신성(요가에서는 바로 이 ‘신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한다)에 이른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① ‘신성’에 이른 상태, ② ‘신성’에 이르는 방법, ③ ‘신성’에 이르기 위한 노력 모두를 ‘요가’라고 한다는 얘기. 그런데 아무래도 ‘신성(본성)’이라는 말은 내가 소화하기엔 너무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신성의 자리에 탐색의 단서가 되었던 ‘마음의 평온과 행복’을 넣어 보았다.
‘마음의 평온과 행복’한 상태 그 자체, ‘마음의 평온과 행복’에 이르는 방법, ‘마음의 평온과 행복’에 이르기 위한 노력 모두를 ‘요가’라고 한다. 그제서야 편안하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더불어 제대로 아는 것이라곤 겨우 이름밖에는 없으면서도 ‘요가’와 남은 생을 함께 하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던 스스로의 대담함(?)이 조금 더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도 ‘요가’라면 나는 ‘요가’를 만나기 전에도 이미 너무나 ‘간절히’ 요가를 하고 있었던 셈인데, 어째서 그런 거창한 기대없이 무심히 시작했던 몸수련을 통해 ‘마음의 평온과 행복’ 속에 더 자주 머물 수 있게 된 걸까? ‘요가’를 한다는 건 ‘힌두교도’가 된다는 말인가? ‘요가’는 어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등등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요가’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했지만 실은 이제야 비로소 진짜 배움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나의 연인과의 사랑도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