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가기전부터 나는 혼자서 집을 지키곤했고
밖에서 뛰어노는것보다는 누워 책을 읽으며 상상에 빠지는걸 좋아했다.
그때 우리 방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던 책장엔
명작동화전집, 창작동화, 백과사전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나는 매일 밤, 책장 앞에 서서
이미 다 읽은 책들 중에서 무엇을 다시 읽을지 고민하곤 했다.
두세 권씩 골라 잠들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특히 작은 아씨들이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빨강머리앤,
톰소여의 모험, 소공녀같은 세계명작동화를 참 좋아했다.
하이디의 별이 비치는 창문이 있는 볏짚 침대와 갓 짠 우유.
앤이 걷던 기쁨의 하얀 길과 빛나는 호수,
작은 아씨들 자매들이 먹던 따끈한 비스킷과 코오피는 어떤 맛일까
상상하면 내복 차림으로 혼자 방 안에 있어도 행복해했다.
최근 뜬금없이 그때 아주 좋아했던 동화의 내용이 떠올랐다.
여러 왕국을 여행하다, 뚱뚱하고 게으른 왕들이
사는 나라에 도착하는 이야기.
그 책이 어떤 책이었는지 도통 생각이 안난다.
엄마와 언니에게 물어봐도, 검색을 해봐도
30년 전 책의 정체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문득, 챗GPT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대에 읽은 세계문학전집이나 세계전래동화거든.
내용은 모험을 떠나는데 서쪽나라의 왕국 중 뚱뚱하고
게으른 왕들이 사는 나라에 가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게 뭐였을까.”
이렇게 시작한 질문은 “초등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쉬운 동화”
“단편인것같아”“ 게으른 나라에 갔을때, 뚱뚱한 공주가
포도를 먹으며 누워있던게 기억나네” 등의 매우 부실하고도 조각난 단서들로 채워졌고
점점 윤곽이 드러나는 것 같아 짜릿함을 느끼며
”삽화는 정말 2~3페이지당 조그마하게 1개정도있었어“
” 흑백이고 책이 얇지않았던 것같아“
”100페이지 넘게 있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용일것같아“
등의 생각나는 모든 정보들을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 대화를 거친 끝에, 드디어 알게되었다.
내가 그토록 찾고있던 책은 1982년도 경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챗 지피티가 찾아준 사진 속의 버건디 컬러에 금박 제목,
누렇게 바스러질 것 같은 그 책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
나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40년 전 책장앞에 서있는 것 같았다.
“그래. 이 책들이 맞아” 며 눈이 번쩍 뜨였다. 만세!
챗 지피티는 그 중에서도 내가 찾던 이야기가 북유럽 동화집일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주었다.
정말 놀라운 AI의 순기능.
인간미라고는 없을 것 같은 AI가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고,
희미한 조각 퍼즐을 하나씩 맞추며 내 어린시절을 복원해주었다.
기억은 사람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기계가 그 기억을 존중하고 꺼내준다는 사실이 기묘하지만 따뜻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