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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 Sep 28. 2024

나도 같이 죽을랍니다 #8

8. 복수를 위하여

해변으로 나왔을 때 내게 든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다시 저 방갈로로 들어가면, 나는 영영 못 나온다는 것. 그전에 뭔가 이들의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면 끝이라는 것.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바닷바람에 안수하의 긴 머릿결이 미역처럼 일렁였다. 문득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잔뜩 빛나는 보석을 헝겊으로 겹겹이 두르고 있는 느낌이랄까.


안수하가 숨을 한껏 들이쉬며 말했다.


“바다, 참 좋아요. 왜 자살카페 사람들이 바다로 가는지 알 거 같아.”


반면에 방기순은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이 줏대 없이 흩날리는 게 싫은지 검은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역시 그 모자에도 ‘충신태권도’라는 노란 글자가 수 놓여 있었다.  


“작년에 이곳으로 수련회를 왔었죠. 저기 저 솔숲에서 보물 찾기를 했거든요.”


방기순이 소년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보물 찾기가 뭔지 아니? 허허.”


별 대꾸가 없자 방기순은 한층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무나 돌 틈에 숫자가 적힌 종이를 숨겨두고 찾는 거야. 그리고 그 숫자에 해당되는 상품을 받는 거지. 나 어릴 때 소풍 가서 그거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거 때문에 나무도 국민학교 때 처음 타봤지. 물론 그러다가 발목이 부러졌지만.”


방기순이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도 보니까 보물을 숨길만 한 데가 곳곳에 보이는군. 어쨌든 나는 보물 찾기가 끝나면 늘 관원들에게 이 말을 해주곤 했어. 큼큼. 잘 보면 보물은 결국 너희들 안에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과 다른 귀한 보물을 가지고 태어난다. 멀리 가서 찾지 마라. 히히.”


방기순이 웃음을 삼키며 낄낄거렸다.


나진언이 물었다.


“아저씨 보물은 뭐였는데요?”


그러자 방기순이 웃음을 멈췄다.


“태권도지.”


내가 물었다.


“그런데 왜 태권도를 버리려 하죠?”

“뭘 버려요? 버린 건 내가 아니요! 그놈에 새끼랑 그놈에 도장에 등록한 내 마누라야. 그들이 내 보물을 버렸지!”


방기순은 한참이나 씩씩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 동반자살을 막을 수, 아니, 유예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해변의 모래를 발로 차며 말했다.


“아무리 복수라 해도, 아저씨는 누구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방기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의를 보고는 못 참는 사람이죠. 게다가 태권도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를 용납하지 못할 걸요.”


방기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층 더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무도인으로서 동업자 정신도 버리고, 이제 아저씨까지 죽음으로 내몬 그 관장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방기순의 눈에 서서히 분노가 감도는 것을 보았다.


“개새끼…”

“이대로 아저씨 혼자 죽으면 이제 그 나쁜 놈의 세상이 되겠네요. 태권도 정신이 무엇인지 이제 아무도 모르게 될 거예요. 그러면 정말로 아저씨의 보물인 태권도는 영영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지도 모르겠군요.”


방기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겠지요.”


나는 방기순의 앞으로 다가가 똑바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복수는 다른 게 아니에요. 죽이라는 것도 아니지요. 보여주는 거예요. 본때를. 진정한 태권도가 무엇인지를!”


방기순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지금 나보고 녀석에게 승부를 걸라는 얘깁니까?”

“못하시겠어요? 질 게 두려운 건가요?”

“그런 양아치한테 내가 질 리가 있나?”

“그럼 왜 제대로 혼도 못 내주고 혼자 죽으려 하죠?”     

“그, 그건… 어차피 망했으니, 그래봤자…”

“망했으니 그렇게라도 해야지요!”


방기순의 눈가에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 나는 이때다 싶어 손가락으로 북서쪽 바다를 가리켰다. 멀리 흐릿하게 무의도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이 섬과 연결되어 있는 작은 섬, 실미도였다.


“저게 실미도인 거, 다들 아세요?”

“그게 뭔데요?”


나진언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안수하는 관심을 보였다.


“어머, 영화 봤어요.”


방기순의 눈동자도 반짝였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네, 북파공작원을 훈련시키던 섬이지요. 김일성 목을 따기 위해 지옥훈련을 했는데, 작전이 무산되고 저들은 사살될 위기에 처했어요.”


방기순이 덧붙였다.


“그래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하고 청와대로 향했던?”

“결국 그들은 군인들과 교전을 벌이다가 자신들의 이름을 버스에 새기고 자폭해요.”


나는 다시 방갈로 앞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모래판에 굴러다니는 조개껍질을 집어 문 안짝에 내 이름을 새겼다.


“적어도 우리의 억울함은 풀고 죽어야 극락에 가지 않을까요? 원혼이 되어 이승을 떠도는 건 더더욱 외로운 일이 될 테니까요.”


안수하가 내게 말했다.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나진언이 덧붙였다.


“방 아저씨 복수하러 가면, 우리 셋만 죽어요?”


바로 그때였다.


방기순이 모래판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를 비롯한 두 사람은 당황한 얼굴로 방기순을 내려다보았다. 태권도인이자 가장으로서 한평생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어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었다. 오로지 자기 자존심과 자긍심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버텨온 사람일 것이었다.


방기순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으로 끝내겠소. 놈의 도장도 여기서 멀지 않아. 그러니까 도와들 주겠소? 왠지 나 혼자서는 다리가 풀려서 도저히 거기까지 갈 수 없을 거 같아. 같이들 가주겠소? 놈을 처절하게 짓밟든, 그러다 내가 짓밟히든, 그 일만 마치고 돌아와서 같이 죽읍시다. 아니, 약속하오. 여기 있는 그 누구든 복수할 사람이 있다면, 내가 이 주먹과 발로 도와주겠소.”


안수하가 팔짱을 끼고 조용히 돌아섰다.


“나는 여기 있을래요. 안 돌아올 수도 있잖아요?”


방기순이 답했다.


“반드시 올 거요.”


나진언은 그런 방기순 쪽으로 다가섰다.


“나쁜 놈은 맞아야 해요. 저는 꼭 보고 싶어요. 제가 같이 가드릴게요. 아저씨.”


나도 방기순 옆에 섰다.


“꼭 오늘밤에 죽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감시를 위해서 동행하겠습니다.”


안수하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나진언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랑 같이 가요. 누나 없으면… 저 무서울 거 같아요.”


다시금 바닷바람이 한차례 우리를 쓸고 지나갔다. 잠시 나진언을 바라보던 안수하가 조용히 답하였다.


“너는 내가 키우던 고양이를 닮았어.”


나진언이 물었다.


“이름이 뭔데요?”

“진솔이.”

“어? 내 동생인가?”


나진언의 말에 모처럼 안수하가 풋, 하고 웃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시 한번 쐐기를 박듯이 말을 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계약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여기서 각서를 쓰지요.”


다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조개껍질로 문 안짝에 조항을 삐뚤빼뚤 써 내려갔다.


- 하나.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안에 이 방갈로로 돌아온다.

- 하나.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의 복수를 돕는다.  

- 하나.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는다.       


“이 정도면 될까요?”


내가 묻자, 그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안수하가 한 가지를 덧붙였다.      


- 하나. 그렇다고 사람을 헤치거나 대중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러라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위인들이었다. 오죽 못났으면 그래서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려 하겠는가. 그러자 이번에는 나진언이 나서서 한 마디를 보탰다.      


- 하나. 그러나 위험이 생겼을 때는 서로를 지킨다.      


나는 안수하와 나진언이 말한 것까지 차례로 써 내려갔다.


“이거 무슨 출사표 쓰는 거 같네.”


방기순이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금세 방갈로로 달려가 스포츠 가방을 열었다. 그러더니 그 속에서 도복 상의를 꺼내 입고, 검은 띠를 허리에 찼다.


나진언이 말했다.


“우와, 진짜 태권도 선수 같아요.”

“이래 봬도 국가대표가 될 뻔한 남자라구.”  


방기순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남들 다 있는 빽만 있었어도 말이지.”


우리 넷은 차례로 조개껍질로 이름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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