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가 넘어서면서 아파트 상가의 불이 하나, 둘씩 꺼졌다. 그러나 유독 한 군데의 불은 여전히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곳의 규모는 상가 서너 개를 이어 붙인 것처럼 꽤 컸다. 게다가 상가 앞에 텀블링과 미끄럼틀, 그리고 샌드백까지 갖다 놓아 얼핏 보면 키즈카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곳의 이름은 ‘태성태권도’. 그리고 그 간판의 밑에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2연패! 산성대학교 태권도학 박사가 운영하는 태권도장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클 태(太), 별 성(星)? 비-얼 같은 소리 하네. 그래서 주변 도장 다 쓰러뜨렸냐?”
택시의 앞자리에 탄 방기순은 기사에게 돈을 건네며 중얼거렸다.
“여깁니다. 내리시지요.”
그러나 방금 전까지 호기롭던 방기순의 태도는 태권도장 앞으로 다가설수록 점점 수그러들었다.
“아저씨, 여기에요?”
내 말에 불현듯 방기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한동안 심호흡을 했다. 그 모습을 보니 덩달아 우리도 숨이 가빠왔다. 막상 태권도장 앞에 오자, 그가 택시를 타고 오면서 해준 ‘25년 전 그날’ 이야기가, 마치 우리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날의 전말은 이러했다.
1996년, 전국체전 태권도 서울시 고등부 대표 선발전.
두 사람이 각각 빨간색과 파란색 코너에서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충신고 3학년 방기순이고, 한 사람은 진성고 3학년 황태성이었다. 주심은 곧 두 사람을 경기장 가운데로 불렀다.
“경례!”
기순은 태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태성은 고개를 살짝 까딱할 뿐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싱거운 녀석.’
이미 앞서 두 차례나 이긴 적이 있기에 기순은 그런 태도를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준비!”
기순은 상체를 살짝 숙인 상태에서 스텝을 밟을 준비를 했고, 태성은 왼발을 슬쩍 모로 빼면서 빈틈을 찾는 것 같았다.
“황태성! 황태성! 대한건아 황태성!”
관중이 제법 들어찬 산성대학교 무공체육관이 환호로 들끓었다. 이 대회의 우승자는 사실상 대한 태권도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산성대학교에 특기생으로 입학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울시 대표로 전국체전에서 우승하면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바로 나갈 수 있었다. 아직 준결승에 불과했지만, 많은 이들은 이 경기가 사실상의 결승이라 보고 있었다.
“서울시 대표가 전국체전을 이긴다.”
이것은 수년 째 ‘국롤’로 이어져왔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 가장 많은 태권도장이 있었고, 또 대한태권도협회와 산하 서울시 태권도협회 등의 주요 기관도 전부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부와 중등부 결승을 마친 경기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5월로 접어들면서 창밖으로 드리워진 나무는 더 푸르렀고, 창틈으로 아카시아 향기가 밀려들면서 사람들의 얼굴은 저마다 상기되었다. 한쪽 기자석에는 웬일로 방송국과 신문사, 잡지사 기자들이 한두 명씩 나와 있었다. 방기순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껏 서울시 대표를 선발하는 대회의 본선인데 기자들이 오다니…’
기순은 아무래도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어 귀빈석을 살폈다. 공교롭게도 경기 시작과 동시에 귀빈석의 중앙에는 누군가 수행비서와 경호원을 대동하고 들어서고 있었다.
‘저건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이자, 거성그룹 이사인 황태진?’
그는 지금 청 코너에서 싸우는 황태성의 큰아버지이기도 했다. 황태진은 태권도협회 전무일 뿐 아니라, 한국격투기연맹의 고문을 맡고 있기도 했다.
“황태성! 황태성! 황태성!”
방기순은 가만히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인 세계선수권대회 우승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대회를 발판으로 국가대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관중석 대부분은 산성대학교의 재단이기도 한 거성그룹의 회사원들과, 역시 그룹의 후원을 받고 있는 진성고 관계자들로 가득 찼다. 한쪽에 기순의 아버지와, 아버지가 운영하는 도장의 학생들, 그리고 여동생 정아가 피켓을 들고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그간 준비한 대로만 하면 돼.’
아버지 방철송 씨는 눈에 힘을 주고 기순을 바라보았다. 정아 역시 침을 삼키며 눈을 반짝였다. 기순은 그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주심의 구호가 울렸다.
“시작!”
“우와아아아!”
기순은 곧바로 태성과의 거리를 좁히며 왼발 앞차기로 거리를 가늠했다. 한두 번 허공을 가르는 헛발질이 오갔다. 기순은 그것까지 계산을 하면서, 상대가 반 발짝 물러설 때 거리를 잡아둔 대로 빠르게 다가서서 돌려차기를 날렸다.
- 빡!
커다란 소리가 체육관에 울렸다. 그러나 관중들은 마치 합을 맞춘 듯 자리에 앉았고, 거꾸로 웬 소녀 한 명이 마치 꽃술처럼 피켓을 들고 뛰어올랐다. 정아였다.
“아싸, 방기순, 우승 가즈아!”
기순은 쉬지 않고 공격을 이어갔다.
‘스코어는 1:0. 시작이 좋다.’
1회전에 ‘1:0’에서 시작된 경기는 2회가 종료되면서 ‘3:0’까지 벌어졌다.
“기순아, 이제 남은 시간은 3분이다. 무리하지 말고, 해온 대로 알지?”
아버지가 운영하는 ‘철송태권도’의 사범이자, 아버지의 후배이기도 한 채선호가 코치석에서 기순에게 주문했다.
“걱정 마세요, 사범님.”
“괜히 머리 노릴 생각 말고, 지키는 게 중요해. 알았지?”
기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사각의 경기장으로 나섰다. 주심이 가운데로 나왔고, 정중앙에 자리한 배심들 역시 분주하게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3분이다! 머리 공격을 허용하거나, 실격패를 하지 않는 이상 이변은 없다.’
방기순은 아버지가 일어서서 주먹을 쥐는 것을 보았다.
“시작!”
이윽고 마지막 3회전이 시작되었다. 기순은 태성에게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 탁!
그 틈을 노린 태성이 왼발을 기순의 옆구리에 먼저 꽂았다.
“끼이요오오오호!”
그와 동시에 잠잠하던 경기장이 들썩거렸다.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기순과 다르게 태성은 주먹을 흔들며 경기장 한 바퀴를 돌았다. 마치 빨리 점수 인정을 하라고 주심에게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것 같았다.
“1점!”
스코어는 3:1. 두 사람은 다시 몇 번의 발차기를 주고받으며 뒤엉겼다.
“달려!”
주심이 두 사람을 떼어내려 했다. 바로 그때 황태성이 씩 웃으며 기순에게 말했다.
“세상이 다 네 거 같지?”
“뭐?”
“거지새끼 주제에.”
그러나 기순은 그런 말에 흔들릴 인물이 아니었다. 기순은 피식 웃으며 거리를 벌리는 동시에 전광석화처럼 왼발을 태성의 옆구리에 꽂았다.
- 빡!
“이런 개새끼가…”
황태성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기순에 이어 주심을 노려보았다. 주심이 살짝 당황한 얼굴로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스코어는 4:1. 시간은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기순은 결코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점수가 유리하다고 피해 다니는 것은 태권도 정신에 위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순은 시간 따위는 아랑곳 않고 다시 빠르게 스텝을 밟아 거리를 좁혔다. 바로 그때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듯이 주심이 둘 사이로 무언가를 쑥 들이밀었다. 그건 노란 카드였다.
“엇?”
기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주심이 노란 카드를 번쩍 들며 모두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다.
“홍, 경고!”
“네?”
기순의 반문에 주심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거듭 외쳤다.
“시간 끌지 마.”
“네?”
채선호 코치가 소리쳤다.
“경고 두 개에 1점에 불과해. 흔들리지 말고, 싸워!”
채 코치의 말에 평정을 되찾은 기순은 경기 시작과 동시에 더욱 빨리 황태성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황태성은 싸울 의지를 잃었는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그저 비릿하게 웃으며 기순을 피했다.
주심이 달려와서 다시 둘 사이를 말리듯 카드를 꺼냈다. 아니, 카드를 다시 들이밀었다.
“홍, 경고!”
연이어 경고가 이어졌다.
“네?”
기순은 다시 한번 크게 놀랐다.
스코어는 4:2. 시간은 39초.
채선호가 소리쳤다.
“이거 뭐야!”
그러나 주심은 잠시 채 코치를 노려보더니 다시 기순에게 소리쳤다.
“홍, 경고!”
이상하게도 박수소리는 점점 고조되었다.
코치가 뭐라 뭐라 소리치려 하자, 관중석에 있는 아버지가 외쳤다.
“야, 진정해! 기순아, 끝까지 싸워!”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은 주심은 다시 기순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홍, 경고!”
스코어는 4:3.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시작!”
당황한 기순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홍, 경고!”
또다시 연거푸 경고가 나왔다.
‘이런 미친! 설마 승부조작?’
기순이 마침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번에는 시작과 동시에 태성에게 더 바짝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태성은 뒷걸음질 치며 기순을 피했다. 다급했던 기순은 이성을 잃고 태성에게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태성이 몸을 살짝 비틀면서 앞차기를 했고, 발끝이 기순의 호구 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끼야아아아아홋!”
태성이 두 손을 번쩍 들고, 경기장 밖으로 뛰어나가며 환호했다.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누구도 그 말도 안 되는 공격에 점수를 선언하지 않았다. 기순은 벌건 얼굴로 입술을 부르르 떨며 주심을 보았다.
주심 역시 아무런 선언을 하지 않았다.
‘10.9.8.7.6.5…’
모두의 시선이 주심에게 쏠렸다. 주심은 잠시 그런 시선을 의식한 듯 경기를 멈추고 부심과 배심을 불러 모았고, 한참이나 무언가를 상의했다. 그러더니 이내 결정한 듯 중앙으로 나왔다.
“청, 1점, 4:4. 동점!”
“우와아아아아!”
장내는 환호로 들끓었다. 기순은 그때 분명히 보았다. 귀빈석에 앉은 황태진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주심에게 눈짓을 보내는 것을.
“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얼핏 아버지 방철송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환호소리에 묻혀서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 경기는 속개되었다.
‘4, 3, 2…’
기가 오른 태성은 그대로 도약해서 이단옆차기를 하기 위해 뛰어올랐다. 기순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세 걸음 물러섰다.
그때였다.
"홍, 경고! 앞전 경고에 더하여, 청 1점!"
스코어는 4:5. 역전이었다.
"이게 어떻게요!"
여동생 정아는 울고 있었고, 채 코치는 엎드려서 머리를 뜯고 있었다.
“아, 이런 게 태권도 정신인가…”
방기순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튿날, 경기의 부당함을 호소하던 기순의 아버지 방철송은 대한태권도협회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한술 더 떠 협회 임원들은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상파 방송 3사를 비롯한 주요 언론사와 스포츠 신문사들은 이례적으로 국가대표 결정전도 아닌 서울시 대표 결정전 결과를 뉴스로 다루었다. 기순의 아버지 방철송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경기의 부당함을 알리려고 했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급기야 채선호 사범을 비롯한 철송태권도 관원들이 국회의사당 앞으로 몰려가 편파판정 및 승부조작의 부당함을 주장했지만, 관련 기사는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대한태권도협회는 관련자들에게 징계를 주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참다못한 방기순의 아버지는 며칠 뒤 난지 한강변에서 번개탄을 피운 채 부당함을 호소하는 유서와 함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한동안 몇몇 기사들이 협회의 문제와 승부조작의 부당함을 운운했지만, 사람들은 곧 그 사건을 잊어버렸다.
황태성은 이후로 국가대표가 되었고, 올림픽 금메달 2연패의 쾌거를 이루었다. 또한 지도자 생활에 이어, 은퇴 후 기순의 동네인 송도를 시작으로, 체인점처럼 전국에 ‘태성태권도’를 열기 시작했다. ‘태권 영웅이 직접 연 도장’이라는 소문을 듣고 많은 이들이 몰렸고, 근처의 작은 도장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아야 했다.
‘아버지도 모자라, 어렵게 일군 내 보금자리까지 뺏으려 하다니!’
기순은 처음엔 분노했지만, 자신을 두둔하고 응원해 줄 줄 알았던 아내마저 등을 돌리자 크게 절망했다. 어쩌면 그 옛날, 아버지 역시 자신 때문에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더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 이거 명백한 편파판정, 승부 조작이잖아요! 이렇게 되면 국가대표도 못되고, 산성대학교도 못 가요. 억울해서 태권도를 못하겠단 말이에요! 이게 무슨 태권도 정신이에요.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그 정신이 이런 건가요? 아버지는 정녕 아무것도 할 수 없으세요?”
말도 안 되는 패배에 울부짖는 아들을 보며 당신의 가슴은 더더욱 찢어졌을 것이다. 한평생 태권도에 대한 자부심만으로 살아온 무도인으로서 아들 앞에 면목도 서지 않을 것이었다.
‘아무리 세상한테 배신을 당했어도, 나만큼은 아버지를 믿고 기다렸어야 했다.’
기순은 이제 와서야 자신이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 마땅한 벌을 내리고자 무의도를 찾았던 것이다.
나는 한 손으로 멍하니 서있는 방기순의 어깨를 쥐었다.
“이제, 가시죠.”
방기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게… 25년 전, 그 이후로 한 번도 서로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길에서 마주쳐도 모른 척 지나쳤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