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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 Oct 05. 2024

나도 같이 죽을랍니다 #10

10. 도장 깨러 왔소이다.

푸른색 매트가 잔디밭처럼 깔린 도장이었다.


넓은 도장의 전면에는 한쪽 면 전체가 전신거울로 덮여있었고, 그 위에는 태극기가 걸려있었다.  


방기순이 안으로 들어서자, 텅 빈 도장의 한쪽에서 도복을 입은 누군가가 샌드백을 치며 몸을 풀고 있었다.


“상담받으러 오셨나요? 지금 문을 닫는 시간이라…”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 그 중년 남자는, 발차기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방기순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굳었다.


그는 여전히 우리를 등친 채 거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어떻게 여기에…”


방기순의 말에 따르면 3년 전 이곳에 왔을 때부터 그들은 대번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차마 25년 전 그날의 기억을 들추기 싫어 오랜 시간 서로를 외면해 왔다.  


방기순 역시 가늠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거울 속의 황태성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저 뒤에 서서 쭈뼛쭈뼛 두 사람을 번갈아볼 뿐이었다. 방기순은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할 말을 골랐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거울 속의 황태성이 아닌, 실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장 깨러 왔네.”

“뭐?”


황태성이 놀란 얼굴로 되묻자, 방기순이 그에게 한 발 더 다가섰다.


“리매치, 어떤가?”

“하하하핫-”


태성이 어어가 없다는 듯 큰 웃음을 터뜨렸다.


기순은 담담한 표정으로, 가만히 도장 한쪽에 조성해 놓은 사각의 경기장 안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홍 코너에 섰다.


“보호구 없이 결판을 내도 좋고.”

“이 사람아, 우린 늙었네.”


방기순의 살기를 느낀 황태성이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한평생 엘리트 체육인의 길을 걸은 나와, 동네 사범이나 하다가 겨우 도장을 연 자네와는 급이 달라.”

“뭐?”


태성이 선심 쓰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25년 전 그날의 경기… 석연치 않은 판정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네. 하지만 이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걸 자네도 알지 않은가? 나였기에 올림픽 금메달을 딸 수 있었어. 자네가 국가대표가 되었다면 불가능했을 걸?”

“이 자식이…”

“나였기에 거성그룹과 큰 아버지의 빵빵한 지원을 받아서 최고의 코치진을 꾸리고, 최고의 훈련을 받을 수 있었지. 덕분에 태권도 종주국으로서, 대한민국의 명예를 세계에 드높일 수 있었고. 국가적인 이득 아닌가?”

“그래서, 그것을 위해 우리 아버지는 희생되었단 말인가?”

“장례식에 못 간 건 미안하네. 차마 면목이 없었네.”

“그러니까 지금 한판 붙자고!”

“자네 이러다가 죽어. 아버지도 죽었는데, 자네까지 나한테 맞아 죽으려고 그러나?”


황태성은 더없이 자비로운 표정을 지으며, 더없이 잔인한 말들을 쏟아냈다.


방기순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니가 죽든 내가 죽든 결판을 내자고!”


방기순은 그대로 황태성에게 쫓아가 발차기를 날렸다. 그러나 태성은 가볍게 그것을 피하면서 기순에게 손짓했다.


그럼 다시 사각의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지.”

“룰은 똑같이 3분 3회전…”


황태성이 다시 손을 들었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자네가 쓰러지면 그만할 생각이네.”

“이 자식이…”

“장담하건대 자네는 3분도 못 버틸걸?”

“이야아아아!”


방기순은 소리를 지르며 태성의 옆구리에 돌려차기를 날렸다. 그러나 태성은 뒤로 반 발짝 물러서며 팔꿈치로 그것을 쳐냈다.


“정말 보호구 없이 싸워도 되겠는가?”

“누구 하나 쓰러지면 그만한다며!”  


황태성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 하나가 아니고, 자네가 쓰러지면 말이지.”


그는 곧바로 앞발을 쭉 뻗어 방기순의 명치를 노렸다.


“윽-”


기습적으로 발차기를 맞은 방기순이 가슴을 쥐며 뒤로 물러섰다. 황태성은 한숨을 쉬며 서서히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3분까지도 필요 없겠군. 어쩜 자네는 늘 이리 쉬운가? 혹시 조룬가?”

“뭐?”


방기순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 새끼가!”

“스코어는 1:0이네.”


황태성은 스스로 점수를 매기기 시작했다.


그제야 방기순은 이대로 싸우다가는 제풀에 못 이길 것을 깨달았는지, 정신을 차리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짧게 앞차기와 돌려차기를 끊어 차며 황태성의 실력을 가늠했다.


“겁을 먹었나 보군?”


황태성은 몸이 풀렸는지 연신 돌려차기를 날리며 과감한 공격을 이어갔다.


- 퍽, 퍼벅!


“스코어는 3:0이네.”


방기순이 한 손으로 옆구리를 감싸 쥐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사이, 황태성은 빠르게 뛰어올라 방기순의 얼굴을 노리며 나래차기를 했다.


- 우웅      


황태성의 발날이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기순의 코끝에 스쳤다.


- 쿵!


방기순이 빠르게 물러서며 발차기를 피하려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모습을 본 황태성이 씩 웃으며 뇌까렸다.


“아직 더 할 맘이 남았는가?”

“물론이지.”


방기순은 다시 일어나서 겨루기 자세를 취했다.


“이야압!”


그리고는 다시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하단 돌려차기를 했다.


- 딱!


마치 볼기짝을 때린 듯 커다란 소리가 경기장에 울렸다. 기순은 정확하게 태성의 엉덩이를 가격한 것이었다. 황태성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기순을 보았다.


“웬 반칙인가?”

“그날, 자네가 내게 날렸던 발차기지. 호구를 스친 덕분에 자네가 1점을 가져갔지 아마? 매수된 심판 덕분에?”

“뭐, 그거야 주심이 알아서 판단한 거지. 내 잘못은 결코 아니네.”


황태성은 선심 쓰듯 말을 이었다.


“좋아좋아. 스코어는 3:1. 자네 한 점 가져가지. 근데 더 싸울 수 있겠는가?”


방기순은 온몸에 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에 반해 황태성은 이마와 콧등에 땀이 조금 맺혀있는 정도였다.


“이 정도면 2회전 정도는 치렀다고 봐야지. 칭찬해주고 싶군.”

“아직 3회전이 남았다. 비겁한 새끼야.”

“쯧쯧, 웃어?”


황태성이 혀를 차며 씩 웃었다.  


“자네 지금 싸움소 같은 거 아나? 그러다가 제풀에 죽을 수도 있어.”


황태성은 곧바로 앞차기, 돌려차기, 옆차기, 뒤차기를 차례로 시전하며 방기순을 두들겼다. 기순은 십수 년 간 엘리트 체육인의 길을 걸어온 황태성의 스피드와 발기술을 당해내지 못했다.  


“흐어흐어-”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듯 간신히 서있을 정도였다.


“방 아저씨! 그만하세요!”


보다 못한 나진언이 울먹이며 말했고, 나 역시 차마 더는 지켜볼 수 없어서 덧붙였다.


“그 정도면 다 쏟아부으셨어요. 충분해요. 그리고 멋지세요.”


그러나 방기순은 아무런 대꾸도 않고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왼발을 살짝 내민 상태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지금 간신히 버티고 선 것이었다.


우리는 잠시나마 서로를 돌아보며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방 아저씨가 할 수 있는 것 역시 없었다.


‘괜히 싸우자고 했나.’  


방기순에게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다.


“후아, 후루루아-”


방기순은 모든 힘을 끌어모아 스스로를 겨우 지탱하는 중이었다.


“서 있는 게 힘들면 쓰러지면 되지 않나? 친구?”


황태성이 잠시 거리를 두고 선 채 방기순에게 말했다.


“가련한 녀석. 그래도 승부를 건 자네의 용기는 참 가상하네. 어떤가, 충신태권도 말고, 태성태권도 지점을 하나 맡아보지 않겠는가?”


황태성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태권도 정신 같은 건 없네. 돈이 중요하지. 그래, 그래서 내가 국가대표를 땄지.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국제심판도 매수했어. 그러나 실력에서 내가 앞섰기에 금메달을 딸 수 있었지. 여기서 실력이란 많은 것을 의미해. 어떤가? 내 밑에서 일하지 않겠나?”


황태성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힘든데 여직 버티고 섰는가? 지점을 열게 해 준다고. 그러니까 더는 그렇게 서있지 말고, 힘을 풀어. 그리고 무릎을 꿇어. 그러면 자네의 새 인생이 시작될 것이네.”


그러나 방기순은 그 순간에도 입을 움찔거렸다.


“이 새끼…”

“뭐라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방기순이 소리치자, 황태성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결국 쓰러뜨려줘야 정신을 차리겠단 건가?”

황태성이 빠르게 다가서며 왼발을 디딘 상태에서 크게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설마, 얼굴을 노리는 건가?’


아무래도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 사단이 날 것 같아서 나는 경기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오지 마!”


방기순은 그 공격을 알면서도,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간신히 아랫배에 힘을 주고 내게 소리쳤다. 나는 그대로 멈춰 서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저씨!”


나진언이 소리쳤고, 안수하는 눈과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바로 그때였다. 바닥을 향했던 방기순의 고개가 올라오면서, 그의 오른발도 덩달아 하늘로 쭉 뻗어 올라갔다. 상대의 얼굴을 노리며 오른발을 치켜든 태성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찰나의 순간에, 하늘로 쭉 뻗은 방기순의 오른발 뒤꿈치가, 허공에 살짝 들린 황태성의 인중을 정확히 타격했다. 기순은 장작을 쪼개듯 마지막까지 힘을 거두지 않고 뒤축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 쿵!


태성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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