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진언이 쫓아가서 방기순의 도복을 붙들었고, 안수하 역시 묵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기순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곱씹어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이내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진짜 짱 멋있었다고요!”
“그, 그랬어?”
“그걸 말이라고 해요? K.O에요, K.O!”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나진언이 방방 뛰면서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방기순은 어딘지 불편한 얼굴로 쭈뼛쭈뼛 뒤로 물러섰다.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 아닌데…”
“무슨 그림이요?”
안수하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방기순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황태성이 기절한 상태라는 걸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들 갑시다.”
“네, 그러죠.”
나 역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 서있었다. 이것을 복수전이라고 한다면, 과연 이 복수는 성공한 것일까? 아니, 복수라는 것에 부합한 것일까? 어떻게 상대를 쓰러뜨리긴 했지만, 그래서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방기순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방기순은 잠시 망연한 표정으로 황태성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눈을 끔벅이며 허공을 보았다가, 가만히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젓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쓰러진 황태성이 갑자기 흰 눈을 뜬 채로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어라?”
방기순이 다시 황태성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한술 더 떠 거품까지 물기 시작했다.
안수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잘못된 거 아니죠?”
“일단 119를 부를까요?”
내 말에 나진언이 발을 동동 굴렀다.
“우리 경찰 조사받는 거예요?”
방기순의 입술도 부르르, 떨렸다.
“어차피 우리는 다 죽을 거지만, 살아갈 사람은 살아야지.”
방기순은 한쪽에 둔 가방으로 쫓아가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다시 전원을 켰다.
“어, 그게, 신고부터 하고…”
나진언이 나섰다.
“어차피 죽어도 되는 원수 아니었어요? 우리는 서로의 복수를 돕고, 같이 죽기로 했잖아요!”
안수하가 나진언의 옷깃을 붙들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헤치진 않기로 약속했잖아.”
“그건 그런데, 그럼 다른 사람 복수는요?”
“그, 그것도 그런데…”
방기순이 핸드폰에 ‘119’ 버튼을 눌렀다. 그때 도장 창밖으로 누군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저깁니다! 저기서 웬 무뢰배들이 우리 관장님을 죽이려고 해요!”
그 사람 뒤로 경찰 두 명이 쫓아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쓰러진 황태성을 걱정하던 방기순은,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자 정말 큰일 났다 싶었는지 다짜고짜 도장 밖으로 뛰기 시작했다. 곧바로 나진언이 안수하의 손을 잡아끌었고, 나도 그들 뒤를 쫓아 달려 나갔다.
“저놈들이에요!”
그 소리와 함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속도를 높여 질주했다. 100m 달리기를 할 때처럼 전력으로 달리면서, 거리가 200m, 300m가 될 때까지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아니, 속도는 줄었겠지만 달리고자 하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마치 그것은 살고자 하는 몸부림과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죽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잡히면 우리의 죽음이 유예되니까…”
400m쯤 달렸을 때, 방기순이 멈춰 서서 우리를 진정시켰다. 더 이상 경찰이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였다. 나진언과 안수하를 앞세우고, 척후병처럼 맨 뒤에서 그들을 따르던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읍- 후욱, 우우욱-”
갑자기 토기가 쏠리며 바닥에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무의도에서 한번 토사물을 쏟아낸 적이 있어선지, 위액이 섞인 쓴 물만 주르르 흐를 뿐이었다.
“석정 씨, 괜찮아요?”
안수하가 다가와 손수건을 내밀었지만, 기력이 다한 나는 그저 멀뚱멀뚱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얀 면에 개나리꽃을 수놓은 예쁜 손수건이었다. 한쪽에는 ‘수요일(wednesday)의 소녀에게’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가만 웬즈데이라고?’
나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서 고개를 들었지만, 여전히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쓴 안수하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모두들, 어서 이리로!”
저만치 앞에서 방기순이 택시를 세운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진언이 쫓아와서 나를 일으켰고, 나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행군하듯 전진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무의도로출발했다.
깊은 밤, 무의도 앞바다는 이상하게도 밤하늘처럼 반짝였다. 마치 달빛과 별빛이 밀물처럼 지구로 쓸려와서 넘실거리는 모양새라고 할까. 한편으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그렇기에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분은 정말 괜찮을까요?”
택시가 해수욕장 옆길로 접어들자, 안수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확 뒈져버리면 더 좋은 거 아녜요?”
나진언이 말하자, 안수하가 ‘쉬잇’하면서 잠시 택시 기사의 눈치를 보더니 속삭였다.
“약속했잖아. 누구도 헤치지 않기로.”
“제때 사람들이 왔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내가 말하자, 조수석에 앉은 방기순이 기사에게 돈을 내밀며 덧붙였다.
“괜찮기를 바라야지요. 어차피 우리는 곧…”
그는 힐끗 기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저희는 대본 연습 중이랍니다.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아유,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택시는 곧 떠났고, 우리는 아까 잡아놓은 방갈로로 갔다. 방갈로의 문짝을 연 방기순은 아까 저녁에 우리가 써놓은 문장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안에 이 방갈로로 돌아왔네.”
“아저씨 복수도 했고요.”
나진언의 말에 방기순이 답하였다.
“복수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같이 가줘서들 고맙소.”
안수하가 엷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 아닌가요?”
“뭐가 말이요?”
“쏟아낼 수 있어서요.”
방기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편으론 공허하더군요. 머릿속으로 수십, 수백 번이나 떠올렸던 장면인데, 막상 실제로 그 그림이 눈앞에 펼쳐지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어요. 이게 정말 내 발차기가 맞는지, 그리고 그놈은 지난날 그렇게 원망했던 황태성이 맞는지. 어쩌면 그 모든 게 꿈은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나는 왜 죽으려 했는지.”
내가 물었다.
“혹시 결심이 바뀌셨습니까?”
“죽으려는 결심 말이오?”
“그렇습니다.”
방기순이 허탈하게 웃으며 답하였다.
“오히려 빨리 죽고 싶어졌소.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군요. 그냥 몸도 마음도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랄까, 이게 대체 뭘까요?”
그는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는 결코 이런 반응을 예상한 게 아니기에 더 긴장이 되었다. 이렇게라도 복수에 성공하면, 그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방기순은 더욱더 절망했다. 황태성에 대한 복수를 하면서 자살에 대한 당위성을 잃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복수란 이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와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며 조금 알 수 있었다. 어떤 증오는 거꾸로 삶에 대한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이제 정말 나와 세상을 잇는 끈은 모두 사라진 것 같습니다.”
안수하가 물었다.
“아내와 자식은요?”
“마누라가 이혼서류 내밀었다는 얘기, 안 했던가요?”
“아, 그런 일이 또 있으셨군요. 그래도 자식은…”
“도장이 망했으니, 양육비는커녕 빚만 안 떠넘겨도 다행이지요. 이 선택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방기순은 애써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게 되었어요. 마지막까지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돕겠습니다. 다음에는 누가 복수를 할 거요?”
우리는 잠시 멀뚱멀뚱 서로를 돌아보았다.
“지옥 같은 하루를 더 보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안수하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방기순이 문짝에 새겨진 문장을 가리켰다.
“수하 씨는 복수할 대상이 없나요?”
그 말에 안수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별로 말하고 싶지 않군요.”
방기순이 이번에는 나를 돌아보았다.
“석정 씨는 어떻습니까?”
나는 잠시 할 말을 골랐다. 비록 자살을 결심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 누군가를 혼내줄 수 있다면 누구를 고를까 생각해 보았다. 내 뒤통수를 쳐서 밥그릇을 빼앗은 한국카드의 구세주? 엄마한테 보이스피싱 사기를 친 놈?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나를 떠나놓고서 미다스의 여왕이 된 한현서? 적어도 이 상황에 계속 편승하려면 누구든 한 명을 언급해야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저기… 저 먼저 조져줄 수 있으세요?”
나진언이 방기순에게 말했다.
“아까 보니까, 아저씨라면 정말 그 새끼들을 죽여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들은 방기순의 눈동자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물론이지. 아, 일진 녀석들이라고 했지? 어디야, 학교가?”
“부천이요. 여기서 별로 안 멀어요.”
“그래, 가자.”
이로써 우리들의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이튿날, 우리는 모두 방갈로 안에서 깼다. 처음에는 안수하를 방갈로에 두고, 세 남자가 밖에서 자는 걸 자처했다. 그러다가 아침에 안수하가 우리를 깨워 방갈로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다시 우리를 깨웠다.
“이제 갈 때가 되었어요.”
안수하는 조그마한 소리로 나진언을 깨웠다. 사실 나는 진작부터 깨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잠시나마 이들의 자살을 유예한 것에 만족하면서 오늘은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때 안수하가 방갈로로 들어왔다. 안수하는 잠시 나진언의 옆으로 가더니, 가만히 그의 심장에 귀를 대보는 것이었다. 여전히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서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안수하가 안심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휴, 뛰고 있어.”
안수하는 혼잣말을 하면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나진언을 흔들어 깨웠고, 나진언은 방기순과 나를 세차게 흔들었다. 문득 그런 안수하의 태도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딱히 묻기도 애매해서 곧장 방갈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 넷은 밖으로 나와서 해변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