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는 꽤 까탈스러운 여자였다. 사람은 어쩜 그리도 타인에 대한 완벽함의 기대치가 높은지. 인터넷에서 주문한 제품의 디테일이 상세페이지와 조금만 달라도 교환을 하거나 반품을 요청했고, 예약했던 숙소의 룸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좋지 않으면 평점에서 별 하나를 뺐으며, 방문한 식당에서 작은 실수라도 나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받기를 원했다. 그러니까 20대, 부모님에게 용돈을 타다 쓰던 시절에는 한 푼도 허투루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타인에 대한 완벽함을 더욱 철저하게 요구했다. 비단 나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사람들은 웬만큼 만족하지 않고서야 별점을 매길 때 5점 만점을 주기를 꺼려했고 5점을 원하는 평가받는 사람들은 5점보다 더한 친절을 베풀거나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다. 난 이 모든 것들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나도 20대부터 인터넷으로 각종 제품을 판매하며 장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고객만족을 위하여 사물존칭이나 과한 감사와 과한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 사은품도 늘 팍팍 준비했다. 당연히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베이를 통해 해외 판매를 할 때 한국 고객들보다 훨씬 더 너그러운 성향의 외국 고객들을 보고 조금 의아해했다. 내가 볼 때는 평타의 제품인데 무척 만족한다며 별점 만점을 주는 고객들이 그저 고마웠다. 그때까지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까다로운 판매자였고 까다로운 소비자로 남길 원했다.
30대가 넘어가며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모님으로부터 완벽한 독립을 했고 그전처럼 아끼고 생활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고정 수입이 가져다주는 여유를 즐기며 살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대학 때 밥을 많이 얻어먹은 선배에게 이제는 내가 밥을 한 번 사겠노라고 허세를 부렸다. 제법 핫한 곳이었고 저녁 피크타임 때라 손님이 줄을 섰다. 우리는 메뉴를 두 개 시킨 다음 꽤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주방에서 실수를 했는지 내가 시킨 것과 다른 메뉴가 나왔다. 게다가 내가 시킨 메뉴보다 1,000원 더 저렴한 것이 나온 게 아닌가. 결제도 선불로 마친 상태였다. 벨을 누르려는 나에게 선배가 한 마디 했다.
“그냥 먹어.”
“왜요?”
흥분으로 눈이 똥그래진 내가 물었다.
“식당 바쁘잖아. 그냥 먹어. 너 이거 싫어해?”
“아뇨...”
“그럼 그냥 먹어.”
“그렇지만 이게 1,000원 더 싼 거잖아요. 그럼 차액이라도 돌려받아야겠어요.”
당연하지 않은가. 나의 권리이고 식당에서 실수를 한 것인데.
“안 돌려받으면 죽을 것 같아?”
“아니요...”
“그럼 그냥 먹어. 괜찮애. 큰일 안 나.”
선배의 요지는 다른 게 없었다. 귀찮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기분 좋게 하는 식사 자리에, 할 얘기도 많은데 돈 1,000원 때문에 굳이 식당 주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사과를 받아야 직성이 풀리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 이해가 가지 않아서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상대방이 잘못한 건데 왜 그래야 하냐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리고 선배가 예측한 대로 그날 식당에서의 우리의 분위기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선배는 늘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후배들에게 밥 사 주는 걸 좋아했고 자신에게 있는 것들을 선뜻 나눠 주고 돈을 빌린 사람이 떼먹어도 가만있었다.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이 싫어서란다. 그때도 나는 선배 같은 사람들이 사기꾼을 키우는 것이라며, 쉽게 보이니까 상대방이 사기도 치는 것이라며 길길이 날뛴 기억이 난다. 나도 대학 때 급하게 선배에게 돈을 빌린 적이 두 번 있었는데 나는 물론 갚았다. 선배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작은 일에 크게 개의치 않는 선배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인지 괜찮은 척하는 것인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대학 때 선배의 기숙사에 가보면 늘 후배들이 와글와글 몰려 있었고 애들은 방바닥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선배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약간의 교주 같은 느낌이어서, 여기 종교 집단이냐며 놀렸던 기억도 있다.
선배의 말은 즉슨, 세상은 꼭 하나를 주고 하나를 돌려받지 않더라도 다른 곳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주문했는데 설명과 다른 제품을 받으면 사실은 너무 귀찮기 때문에 반품을 못 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 줘 버리거나 대충 쓴다고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큰일 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란다. 세상에 들어본 적 없는 개똥철학이라 나는 몹시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날 이후, 1,000원을 손해 보고도 처음으로 가만있어본 후에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달라져 버렸다. 1,000원을 손해 보았지만 진짜 아무 큰 일도 나지 않았고 정말로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이 괜찮았던 것이다. 배달음식점에서 바빠서 일회용 젓가락을 챙기지 못했다고 해도, 주문한 제품 색깔이 잘못 왔다고 해도, 심지어 주문한 음식에 작은 머리카락이 하나 들어있다고 해도. ‘큰일 안 나지’하며 내가 받은 피해를 극대화시켜서 공분하지 않게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나도 일을 하며 숱한 실수를 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에 대한 피해를 받았을 텐데, 내가 판매하는 제품들도 100% 만족스럽지 않을 텐데, 그때마다 그 모든 사람들이 환불해 달라고 아우성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냥 지나쳐 주었겠지. 큰 일 아니라면 그냥 눈 좀 감고 넘어가 주면 되지 하는 여유로움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행히 그것을 알고 시골로 내려왔기 때문에 시골생활을 적응하는데 좀 더 수월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동네는 시간관념이 지나치게 철저하지 않고 일처리에 대중이 없을 때도 있다. 제시간에 일처리를 못한 공무원이 죄송하다고 얘기했을 때 ‘괜찮애요’하며 돌아서면 내 마음도 상대방 마음도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그로 인해 내가 받는 불상사에 대해서는 ‘그냥 오늘 이럴 운명이었나 보다’하고 넘길 수 있다. 어디 가서 컴플레인도 웬만해선 걸지 않게 되었다. 괜히 상대방에게 듣기 싫은 말을 하기보다, 적당히 만족하고, 만족이 되지 않으면 그냥 다른 집을 가면 되고. 아쉽고 모자란 점은 내가 사업을 할 때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면 될 일이었다. 내 마음에 어떤 여유가 들어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먹은 내 마음이 천국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배우는데 내가 낸 수업료는 단돈 1,000원. 어쩌면 선배는 나와 실랑이하기가 더 귀찮으니 내가 1,000원을 돌려받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어도 될 텐데 1분이면 환불받고 끝날 일이었는데 굳이 한 시간 내내 실랑이를 하며 나를 변화시켜 주었다. 만일 그날 1,000원의 손해를 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껏 조그마한 상대방의 실수에도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조목조목 따지고 다는 피곤한 인간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마음을 놓고 인생을 사는 법을 배웠으니 고맙기 그지없다. 살면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그렇기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사람을 가까이 두게 된다. 선배는 나중에 나이가 들면 불가에 귀의하고 싶다고 한다. 나는 선배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내 주변에 있는 진정한 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