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첫 강아지는 나처럼 이렇게 어설프게 키우는 건지.
대형견 네 마리 중형견 한 마리를 키우며 사는 나는, 처음부터 강아지를 이렇게 많이 키워야지 결심했던 건 절대 아니고 어쩌다 보니 사무실에 한 마리 한 마리씩 들어온 강아지들이 하는 귀여운 행동들에 마음을 열다가 어느새 정이 들고, 개들이 추울 텐데, 배고플 텐데 하는 측은지심까지 생기더니 어느덧 교감을 하며 절친한 강아지 주인이 되어 버렸다.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전까지 나는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강아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면 무서워서 다음 차례를 기다릴 정도였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을 따라온 첫 강아지에게 얼마나 푸대접을 했겠는가.
우리 집은 도도, 비취, 뚱이, 마초 네 마리의 25kg가 넘는 대형견들이 상주하는 집이었다. 각자 사연이 있어서 지인에게 받은 아이들로, 이름 역시 우리가 지어준 것이 아니었다. 주인 손을 떠난 개들이 얼마나 낯설고 외로울까 싶어서 나는 개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갔다. 그랬더니 며칠 낯가림을 하던 개들도 붙임성 있게 배를 뒤집고 애교를 부렸다. 그래도 개들 키울 만한 넓이의 마당이 있었던지라, 개집을 한 칸 한 칸 늘려 주며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막둥이 길동이는 달랐다. 밥 얻어먹겠다고 우리 집으로 들어온 3kg짜리 새끼 강아지. 길에서 왔다 하여, 또한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날쌘 놈이라 ‘길동’이라고 우리가 유일하게 직접 이름을 지어준 강아지. 겨울이면 밖에서 키울 수 없어서 실내로 데려와야 하는 작은 강아지. 유일한 암컷이라 생리 때면 분리를 해 줘야 하는 손이 많이 가는 강아지였다. 나는 당연히 길동이를 맡을 생각이 없었다. 내 집에 강아지를 들인 일은 일생에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주로 회사 선배들이 데리고 가서 지내던 길동이는 간혹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내가 데리고 와야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길동이를 베란다에 놓고 하루종일 방치했다. 주인이 놀아주지도 않고 베란다 창 너머로 종일 컴퓨터 붙들고 일하는 모습만 보여도 길동이는 까만 눈만 깜빡깜빡 거리며 얌전히 있거나 곤히 잠 들어 있곤 했다. 우리 집에선 베란다에만 두니까,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면 벌벌벌 떨면서 다시 베란다로 도망가 버렸다. 나가자고 하면 사무실로 가는 줄 알고 잽싸게 나를 따라 나오고 사무실에 도착하면 제 집에 도착했다고 신이 나서 삑삑거리며 좋다는 표현을 해댔다. 그러다 또 내가 집에 가자고 하면 얼른 차로 올라와 조수석 발밑에 앉았다. 의자 위로 올라오라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또다시 집에 와서 베란다에 놓으면 얌전히 지냈다. 밥을 주면 밥을 먹고 물을 갈아주면 물을 마셨다. 나가자고 하면 나갔고 목줄을 풀어놓아도 내 뒤만 졸졸졸 따라다녔다. 함께 있는 시간들이 지나니 길동이와 정이 들기보다 조금씩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지인들이 강아지를 키우는 모습을 보면 이렇지 않던데. 물고 빨고 데리고 자는 반려견들을 보며 조금 시니컬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길동이는 무뚝뚝한 나를 보고 그래도 주인이라고 졸졸 따라다니는데 세상에 이런 인정 없는 주인이 있으랴 싶었다. 길동이는 네 마리 강아지들 중 가장 늦게 나와 교감을 했다. 내가 마음을 열지 않으니 길동이도 완벽하게 나에게 마음을 놓지 못한 듯했다. 실수로 스치기만 해도 깨갱 하며 놀랐고, 내가 안으려고 들어 올리면 벌벌벌 떨었다. 나는 길동이가 고소공포증이 있는 줄로만 알았다. 다른 강아지들은 안아 달라고 난리인데, 길동이는 고양이처럼 사람 손을 타지 않는 성향이라고만 생각했다.
춥고 더운 날이 오니 길동이를 방 안에 들이게 되었다. 겨울엔 따뜻하게, 여름엔 시원하게 에너지를 써가며 방 온도를 조절하면서 나 혼자 쓰긴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안방의 소파 밑에 간식을 던져주니, 그곳이 자기 집인 줄 알고 들어가서 쉬었다. 나는 우리 강아지는 길에서 온 강아지라 막 키워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강아지를 키우는 지인이 집에 놀러 오며 선물로 강아지 침대를 사 주었다. 베개도 달린 네모반듯한 침대였다. 나는 우리 강아지는 길에서 온 강아지라 땅바닥에서 자는 게 습관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침대를 두면 로봇청소기가 털 청소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새로 생긴 침대를 깔아 주고 간식을 올려 주었다. 처음으로 폭신한 침대를 가지게 된 길동이는 침대에 달린 베개를 베고 사람처럼 누워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매일 씻겨주고 잠자는 길동이를 쓰다듬어주고 장난을 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자 길동이는 내가 쿵 하는 소리를 내도, 실수로 자기를 살짝 밟아도 전처럼 경기를 하지 않고 ‘낑’ 소리 한 번만 내고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밖에서 길동아, 하고 손을 내밀면 쉽게 나에게 와서 안긴다. 나에게 안겨서 높은 시선으로 세상 구경도 실컷 한다. 고소공포증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전까지는 내가 못 미더웠던 것이다. 사료나 간식 밖에 사줄 줄 몰랐던 나는 강아지를 키워보며 겨울이 오면 닭죽을, 힘이 부칠 때는 황태 두부국을, 영양을 주고 싶을 땐 소 간을 만들어 주는 법을 배웠다. 길동이는 이제 3년 넘게 나와 함께 살고 있는데 이제 우리는 서로 척하면 척이다. 내 말도 사람처럼 알아듣고, 나도 길동이의 신호를 귀신같이 알아본다. 길동이가 쉬가 마려운 지, 배가 고픈 지, 밖에 나가고 싶은지, 졸린지 이제는 알 수가 있다. 아예 자동차 뒷좌석에 길동이 전용 시트를 깔아주어 기사처럼 뒷좌석에 앉은 길동이를 모시고 다닌다. 나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는 길동이는 창문에 코 자국을 잔뜩 찍어놓고, 내가 깜빡이만 켜면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팔걸이에 폴짝 올라와 감시를 한다. 제대로 가고 있는지.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인간관계에 그렇게 집착하는 타입이 아니다. 한 달 동안 아무 말 않고 살아도 상관없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진짜다. 대신 하루종일 나 혼자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면 슬그머니 도망을 간다. 친구들과 함께 가는 단체 여행이라든지, 가족들과 하루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상황이면 혼자만의 시간을 찾아 떨어져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그랬으랴. 없었던 것이 생기며 어느 순간 그 존재가 없이는 살기 힘든 사람이 된다. 자식이 생긴 부모나, 연인, 친구, 혹은 이웃. 나에게는 길동이가 그렇다. 아마도 길동이에게 내가 그런 존재인가 보다.
길동이를 사무실에 두고 외근을 다녀오면 하루종일 내가 떠난 자리만 바라보고 있다. 하루 이틀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하지만 하얀 승용차 한 대만 지나가도 목을 빼놓고 그리로 본다고 한다. 어쩌면 나는 나를 기다리는 존재 때문에 나를 찾는 사람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제 만일 다음 강아지가 우리 집에 온다면 나는 아마도 정말 능숙하게 모든 것을 해 줄 것 같다. 처음부터 침대도 사주고 집도 꾸며주며, 보양식도 뚝딱뚝딱 만들고, 적정량의 식사도 만들어 주겠지. 길동이에게 실수하며 했던 모든 것들을 앞으로 내가 만나는 모든 강아지들에게 익숙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얌전하고 착해서 더욱 미안하고 측은한 내 첫 강아지. 주인도 없었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던 강아지. 해주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나를 주인으로 점지해 나만 따라다니는 강아지. 오늘도 내 집을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고 넋 빠지게 자고 있는 강아지에게 내가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의리는 죽을 때까지 함께 있어주는 것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