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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Nov 16. 2018

아빠는 인생 선배니까

 아빠와 냉담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사춘기 때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약 십 년간 그랬다. 고등학교 다닐 때 아빠와 사적인 이야기를 제대로 한 적이 없던 아빠가, 중국으로 대학을 간 딸에게 가끔 전화를 거셨다. 어찌 지내니 춥지 않니 지낼만하니 하는 겉도는 대화가 사뭇 불편했었고, 그마저도 얼마 못 가 그만 소원해지고 말았다. 아빠의 한 두 마디에 나는 쉽게 토라졌고 절대 아빠에게 먼저 전화 거는 법이 없었다. 차라리 아빠의 전화가 끊기자 홀가분했다. 마치 떨어져 사는 내가 몇 시에 귀가를 하나 감시하는 느낌도 받았으니까. 어린 딸을 멀리 중국까지 유학 보내 놓고 아빠 혼자 날마다 걱정이 많았을 텐데, 나는 그 후로 모질게도 몇 년간 아빠에게 전화 한 번 하지 않았다. 내 소식은 늘 엄마에게 전했을 뿐이었다. 아빠는 그동안 낮에는 회사, 밤에는 가게를 보는 고된 시간을 묵묵히 견디며 7년간의 나의 긴 유학을 뒷바라지해주셨다.


 아빠에 대한 절절한 감정을 느낀 것은 사회생활을 하고 난 후였다. 이렇게 벌어먹기가 힘든데 대체 아빠 혼자 무슨 수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우리 네 가족, 게다가 시골에 계신 할머니까지 부양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렇다. 뼈 빠지게 밤낮으로 일해서 하고 싶다는 공부 다 시켜 줬더니 은혜도 모르는 딸년은 아빠한테 데면데면하기만 하니, 내가 아빠라도 미운 감정이 고개를 쳐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즈음은 아빠도 지긋지긋했을 나의 뒷바라지가 끝났고, 나도 가끔 아빠에게 용돈 봉투를 건넬 수 있어서 나름 으쓱했던 시기였다. 내가 장사를 시작하고 나니 아빠에게 조언을 구할 일들도 많아졌다. 그때부터 나는 아빠에게 종종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아빠.”

 “어, 그래, 요새 물건은 좀 많이 팔리냐?”     


 장사 선배였던 아빠의 첫인사는 항상 이랬다. 아빠도 처음에는 나의 창업을 반대했지만, 회사를 다니며 투잡으로까지 끈덕지게 장사를 하다, 결국 자리를 잡은 것을 보고 꽤 대견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는 주로 디테일한 질문보다는 손님을 대하는 태도, 서비스 마인드, 한 해 한 해 지나며 다음 연도의 큰 그림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아빠에게 조언을 구하곤 했다. 질문은 늘 비슷했고 아빠의 대답은 한결같았지만 아빠와 나의 ‘질문-대답’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아빠랑의 대화시간은 늘 불편한 상사와의 자리처럼 피하고 싶은 것이었는데 한 두 마디 늘리다 보니 이야기가 자연스러워졌다. 아빠와 대화를 할 때는 주로 내가 질문하고 아빠가 대답을 하는 편이었다. 아빠는 아빠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매우 평범한 대한민국의 아버지인 것이다. 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기보다 본인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할 수 있는 엄마와는 대화법이 사뭇 다르다. 아빠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하는 편이라 나도 아빠가 신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이 즐거웠다. 특히 아빠가 잘 알 만한 것들을 물어보면 더욱 신명 나게 말씀해 주신다. 온라인으로 사업을 하는 것은 어린 내가 더 나을지 몰라도, 오프라인에서 발로 뛰는 일은 절대 아빠를 따라갈 수 없다. 어떻게 점포를 선택했는지, 가게 계약을 하기 전에 몇 날 며칠을 낮이고 밤이고 차에 앉아 엄마와 그 주변의 유동인구를 관찰했다던지 하는 이야기는 어디 가서 들을 수 없는 산 경험이라 이렇게 아빠와 대화를 한 날에는 다이어리에 꼭 요점을 적어두기도 했다. 이러니 전화통을 한 번 붙잡으면 30분, 1시간 통화가 금세 흘러가는 것이다.     


 아빠가 우리가 어릴 적에 첫 회사를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는지 지금의 회사를 어떻게 옮기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우리 집에 차가 없었는데, 아빠의 오토바이를 타면 아빠 엄마 사이에 폭 끼어서 다니곤 했다. 어느 한 시절 유난히 자주 멀리 여행을 다녔던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아빠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싶어 엄마와 나를 태우고 삼천포로, 고성으로 돌아다닌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을 수 없으니 직접 발로 가 보고 눈으로 보아야 알 수 있는 시절이었다. 앞으로의 살아갈 날을 고민하며 오토바이를 내달렸을 아빠 등에 매달려, 낯선 곳에 콧바람 쐬며 여행하는 것이 30여 년 전의 나에게는 마냥 천진난만하게 즐거웠던 것이다.

 할머니와 통화를 하면서는 그다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할머니와도 친하다. 통화하며 낄낄대고 농담 따먹기도 많이 한다. 역시 할머니에게 질문을 많이 하면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아빠가 차마 다 털어놓고 말할 수 없던 아빠의 힘들었던 취업 과정까지 할머니는 낱낱이 이야기해 주신다. 서울에 자리를 잡아 보겠다고 80년도 당시에 15만 원의 거금을 들고 올라갔다가 홀랑 다 쓰고 내려와 할머니와 악을 쓰며 싸우고 집을 나갔다고도 한다. 취업이 잘 되지 않아서 막노동 버금가는 힘든 일을 하며, 좋은 직장 하나 갖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셨다고 한다. 아빠에만 그치지 않는다. 아빠의 오 형제들, 작은 아빠들과 고모들 이야기도 길다. 몰랐던 이야기를 듣다 보면, 20살 어렸던 작은 아빠들이 어떻게 혼자 모르는 도시로 나가 시험을 치고 취업을 하셨던 것인지. 잘 데가 없어서 먼 친척 집에 이리저리 얹혀살며 취업을 준비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작은 아빠들이 왠지 짠해져서 뭉클하게 애정이 샘솟는다. 이렇게 통화를 하자면 30분이 훌쩍 지난다. 주말 여유 있는 시간에 이렇게 할머니나 아빠랑 통화를 하면 시간 참 헛되지 않게 잘 보냈다는 만족감이 크게 든다. 엄마야 말할 것도 없다. 엄마 딸 사이는 원래 친구니까. 내 친구들을 엄마가 속속들이 알고, 나도 엄마 친구들 손자 손녀 수까지 다 알 정도니까.


 효도하는 방법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 아이를 어떻게 잘 키울 수 있을까.’와 같이 모호하고 정답이 없는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 곁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시간을 많이 갖고 추억을 쌓는 것이야말로 부모님이 가장 원하는 것일 것이고, 자식으로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 밥을 먹는다, 술을 먹는다, 여행을 간다... 어색한 부모 자식 간에는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혀 올 일이다. 대화가 통하고 공통된 관심사가 있어야 무엇을 함께 하든 즐거울 것 아닌가. 그래서 아버지들이, 사위 될 사람이 오면 혼자 데리고 나가 술 한 잔 하며 밤새 이 얘기 저 얘기를 하고 돌아오시나 보다. 잘 모르겠으면 물어보자. 궁금한 것이 없으면 질문 거리를 준비해 가서라도 물어보자. 무뚝뚝한 우리 부모님들이, 처음에는 단답형으로 답하실지 몰라도, 뭐 그리 궁금한 게 많냐며 핀잔을 주실지 몰라도, 자녀와의 대화가 싫으실 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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