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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Jul 13. 2020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

어떤 삼촌

 내가 고등학생 때 내 방에 나만의 컴퓨터가 한 대 생겼다. 친구들과 '교환일기'를 돌리거나 '펜팔 친구'와 서울에서 부산까지 우표 붙여 편지 쓰던 시절에 '이메일'이라는 신문물의 등장에 우리는 열광했고, 채팅이라는 문화의 도래에 어른들은 세상의 종말이 온 듯 우리를 걱정했다. 나는 세이클럽의 '시샵'이 되고 다음 카페의 '쥔장'을 자처하며 여러 커뮤니티를 만들며 인터넷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오늘 나 왜 이리 옛날 사람 같냐...)

 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잠만 자다가 체육관 가서 운동을 하고 집에 오면 컴퓨터를 켜고 새벽 3~4시까지 여러 가지 놀이를 하는 것이 매일의 루틴이었다. 바빴다. 세이클럽의 시샵이었으니 클럽을 관리해야 하고, 매일 밤 전국에서 모이는 우슈 선수들의 채팅방에도 들어가야 했고, 카페 관리에, 여기저기 이메일을 보내고 답장을 하고. 플래시랑 포토샵 공부도 하고. 좋아하는 음악도 소리바다에서 받아서 시디도 굽고.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배움을 혼자 배워야 했기에 낮 대신 밤 시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신세계에 빠져 방 문을 걸어 잠그고 내가 만든 동굴 속으로 끝없이 들어갔다. 사춘기 었던 나와 부모님과의 관계는 더욱 멀어져 갔다. 부모님은 나를 전혀 이해 못했지만 나는 인터넷 게시판에다 글을 쓰고 내 커뮤니티를 관리하며 꿈을 키웠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에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선생님? 스튜어디스? 과학자?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컸으니 장래희망도 한정적이었고, 구체적이기보다 뜬구름 잡기 식이었다. 대학을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지만 그 시절에 나 혼자 머리 싸매고 밤새 익스플로러를 '탐험'하던 경험이 인터넷 쇼핑몰로 돈을 벌고, 여태껏 글을 끼적거리는 작가가 되는 데에 큰 자양분이 되어 주었음은 틀림없다.


 한 달에 문자 300통을 쓴 탓에 27,000원의 휴대폰요금 폭탄을 맞고 엄마에게 두들겨 맞은 내 마음을 조심스레 두드린 삼촌이 있었다. 어느 날, 이메일로 모르는 사람의 편지가 온 것이다. 발신자 이름은 '핸처리'. 아빠의 친한 후배 현철이 삼촌이었다. 지금이야 매일 쏟아지는 이메일의 홍수 속에 새로운 메일이 피곤하기까지 하지만, 그땐 누군가 나의 이메일 주소를 알고 나에게 편지를 써 준다는 사실이 고맙고 신기한 일이었다. 편지를 장문으로 써주면 써 줄수록 더욱 의미 있었고 그에 대한 답을 충실히 하기 위해 나 역시 장문의 글을 쓰느라 불 밝히는 밤이 잦았다. 그 이메일들의 바탕화면을 꾸미느라 편지지를 신중하게 고르기도, 직접 플래시로 반짝반짝 거리는 별과 폭죽 같은 걸 만들어 넣기도 하지 않았던가. "쓸데없는 짓"하며 시간을 보낸다던 부모님과 달리 (결국은 이때 공부한 실력으로 내 쇼핑몰 초창기에 대문을 직접 제작했는데) 거친듯한 말투였지만 삼촌은 자상하게 아빠와 내 사이를 조율해 주었다.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알 턱이 없었다. 아빠가 나를 좋아한다니. 먹고살기 힘들다며 늘 힘든 표정을 하고 칭찬보다는 늘 혼내기만 했던 아빠를. 밖에서 내 자랑을 하면,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아빠의 자랑을 위한 수단이겠거니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동생에게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달랐다. 같은 말을 하면 내 말에는 정색을 하고 동생 말에는 껄껄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저 경상도 아빠임을, 아빠만큼 나도 무뚝뚝하고 애교 하나 부릴 줄 않았던 것은 생각 못하고. 그저 툴툴거렸다. 어쩔 수 없었다. 아빠보다 훨씬 어렸던 내가, 세상을 산 지 20년도 채 되지 않았던 내가 과연 뭘 얼마나 알 수 있었을까. 삼촌은 그랬던 우리 둘 사이의 교량보 역할을 해 주었다. 한두 번이 아닌 여러 번, 수많은 편지로. 짜샤, 인마, 라며 나를 뭐라고 하기도 하고 내 고민이 뭔지 내가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들어주기도 하고. 어쩌면 그때의 삼촌이, 아빠보다 나를 더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에게 불만이 많은 나에게, 삼촌은 아빠를 두둔해 주며, 남자로서 강하고 고집 있고 결단력 있는 성격은 단점이 아닌 장점임을 강조했고, 사회생활을 하는데 남자로서 필요한 요소를 많이 갖춘 아빠를 삼촌은 존경한다고 말해주었다. 대체 누구의 아빠란 말인가. 나조차도 존경하지 않았던 고지식하고 꽉 막힌 아빠가 누군가의 존경의 대상이라니. 삼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10년 넘게 사업을 하면서, 부드러운 엄마 쪽이 아닌 폭풍 같은 아빠의 성격이 나와주어 정글 같은 사회생활에서 수차례 나를 보호해 주었다. 이제는 아빠를 존경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반성하고 있지 않은가.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면 현철이 삼촌이 생각난다. 친삼촌도 아니고 옆집 아저씨도 아닌데. 그저 어릴 적부터 간간히 나를 봐왔던 아빠 동료였을 뿐이었는데. 삼촌도 가정과 아이가 있어서 매일이 바빴을 텐데.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저녁이면 정성스레 (아마도) 독수리 타법으로 나에게 편지를 써 주었던 것이다. 한 소녀가 자라면서 만나는 성인 남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큰가. 아빠의 자리가 얼마나 크고, 삼촌들의 역할 또한 얼마나 큰가. 성인 남자들이 소녀들에게 가할 수 있는 가학적인 나쁜 사건사고들을 접할 때면 나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가 싶은 때가 있다. 소녀였을 시절 만나 아직까지 안부를 전하는 학교 안팎에서 만난 남자 선생님들이 그렇고, 사건사고 많은 체육계에서 만난 정말 좋으신 사부님이 그랬고 현철이 삼촌이 그렇다. 부모가 아닐지라도 부모처럼 나를 챙겨주는 사람도 있고, 부모님과 관계가 나빠졌을 때 그것이 안타까워 옆에서 부추겨 주던 고마운 사람들. 어릴 적에는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생각되지만 크면 클수록 그 고마움이야 말해 무엇하나. 나도 그저 친구의 아이들, 조카들에게 따뜻한 이모가 되어주어야지 하고 다짐할 뿐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문득 삼촌이 참 고마워서 이메일을 다시 찾아보니 없다. 20년 전 사용했던 이메일이니 아이디와 비밀번호 모조리 잊어버렸다. 간직하고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 삼촌을 다시 만난 것은 지난 외할아버지 장례식 때였다. 십여 년 정도 못 보았던 것 같다. 삼촌이 ‘나 알겠니?’ 하는데, 아 그럼요 삼촌. 알다마다요. 어떻게 삼촌과 있었던 일들을 잊을 수가 있겠어요. 장례식장이라 살갑게 삼촌을 대하지 못하고 식구들 난리통에 물 밀리듯 빠져나왔지만 그 후에도 한참 동안 삼촌에게 연락을 한 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연락처를 알아내기에는 뭔가 좀 쑥스러웠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자 옛일 따위는 잊고 정신없이 내일을 위해 살뿐이었다.


삼촌이 이거 죽을 때까지 꼭 우리 둘만 알고 있는 비밀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여러 번 저에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이렇게 만천하에 공개해 버렸네요.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아빠도 이해해주겠죠. 이 정도 되면 삼촌, 저랑 밥 한 번 드셔야 하지 않을까요? 예전에 삼촌이 롤러 브레이드를 사주셨잖아요. 사주기만 하고 타는 법은 안 가르쳐주셔서 지금도 저 사실 롤러브레이드 잘 못 타요. 지금이라도 AS 좀 해 주시겠어요? 그런데 그 때로부터 20년도 더 지나 저도 롤러브레이드 탈 나이는 지났고 받기만 할 나이도 지났으니... 이제는 제가 밥 한 번 사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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